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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유럽

by loveson 2019. 7. 7.

 

 

 

  

       

AD 0190  로마  ▶ 마그네시아

            

 

             - 그리스 반도가 로마의 통치아래 놓임

             - 로마 제국의 아시아 최초 속주 탄생          

       

  

AD 0226  사산조 페르시아 등장

             -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        

  

 

AD 0293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 실시

             - 천민 출신, 병졸로 시작하여 황제에 등극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단독으로 제국방어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를 넷으로 늘림. 사실 로마 제국에서 '공동 황제' 체제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지만,

               이전에는 '후계자 지명' 혹은 임의적인 체계였던 반면 사두정치 제도는 상설화되고 체계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AD 4C  로마 제국의 쇠락                                                  

- 잘나가던 로마 제국은 왜 점점 쇠약해졌을까??

- 로마인을 하나로 모아보려고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인정도 하고, 수도도 옮겨보았지만 결국 분열됨.

- 서로마는 훈족을 피해 남하한 게르만족에 멸망당했지만

- 동로마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켜나감,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법전편찬, 옛 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 탈환           

- 서로마는 크리스트교로 게르만 누르려고 성상숭배, 동로마는 성상숭배 금지 => 서유럽 로마카톨릭 vs 동유럽 그리스정교 대치

- 로마제국 멸망원인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merta22&logNo=10165904238  

   - 목욕을 좋아하던 로마인

   - 상수도 Pipe에 납을 사용했고, 심지어 포도주에 타서 마시기도 했다. 결국, 중독현상 나타나고

   - 문란한 성문화 확산되어 타락했다?

       

 

AD 0313  밀라노 칙령

             - 로마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을 다스리던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결과였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도 공인되었다. 로마 제국내의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주고 기독교인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권리를 보장해주며, 둘째로 기독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했다. 이는,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서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 적극적인 의미의 기독교 보호 및 장려의 의미

    

      

AD 0324  로마 제국의 천도  

             - 로마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 단독지배 전쟁에서 승리하여 동방의 리키니우스 황제를 격파/처형함.

             - 제국을 통일하고 기존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천도함.

                * 북방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방어에 위태로웠던 로마를 버리고 비잔티움으로 천도했다고도 함.

                *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후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개명함(AD 337) 

             - 또한, 기독교 공인(합법화)하는 등 "친기독교 정책" 시행으로 국가와 교회간 밀접한 관계가 형성됨.

    

      

AD 0363  율리아누스 황제 사망

            

 

             - 율리아누스 황제는 뭐가 유명한가??

             - 페르시아(샤푸르 2세)와 전쟁을 벌이다 사망

             - 후임 요비아누스 황제는 로마군의 귀환을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평화조약 체결하였으며, 이라크와 터키 일부, 그리고

                티그리스강 동쪽 지역전부 등 로마제국의 상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 양도함

 

 

AD 0378  고트족의 침공

             - 4C말 훈족이 침입하여 동고트, 서고트족을 압박했고, 동고트 족장이 아틸라에게 죽고, 이에 서고트족장이 트라키아로

               이주허락 요청해서 발렌스 황제가 허락했으나 트라키아 총독(루피키누스)이 황제명 거역하고 서고트족을 탄압했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로마군이 서고트족에게 패함.

             - 이후, 서고트족 포함 고트족 전체와 훈족이 로마제국을 압박해서, 로마가 전면전에 돌입하였고, 서방의 지원군 도착이

               늦음에도 고트족과 한판 붙었다가 완패함.

          

       

AD 0379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동부 황제 즉위

             - 즉위후 서방을 침공하여 로마제국 전역을 통치, 최후의 동/서로마 통합 황제

             -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다른 종교행위 금지, 이교도 박해, 올림피아 경기 금지

   

 

AD 0395  마 제국의 동/서 분할

            

 

             -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하면서 두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줌.

                * 광활한 제국의 효율적 통치를 위함. 종교적 이유는 전혀 없었음. 이후 완전히 분리하여 통합안됨.

             - 동로마의 군신은 서로마를 낮춰보았고, 이후 서로마에 이민족 침입시 지원군 안보냄.

             - 오히려 동로마를 보호하기위해 동로마에 침입한 이민족을 회유하여 서로마로 보냄.

             *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 가톨릭의 수장을 놓고 논쟁함.

             * 서로마 제국 황제가 스스로 교황이라 칭했고, 이에 동로마 제국 황제가 성상을 부수라고 했지만(우상파괴령, AD 726),

               서로마는 이민족포교 위해서 불가하다고 맞섬. 이로써 종교적으로도 분열됨.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 : 교황이란?

     

      

     

  AD 5C말  서로마 제국 멸망 :  "중세시대" 시작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jj_1&logNo=221401725304&categoryNo=0&parentCategoryNo=0 : 중세 서유럽 형성

- 유럽의 중세는 5C말(AD 476, 게르만 남하 & 서로마 멸망)부터 15C말(AD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or AD1492 신대륙 발견)

  까지의 시기이며, 대항해 및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세(16C ~ 19C초) 이전까지의 시기           

- 중세 상반기(5C ~ 10C)는 원시 게르만 사회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봉건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과도기 시기이며,

  11C부터 중세사회는 변환기를 맞게 되는데, 지중해 무역발달로 상업이 부흥하여 도시가 탄생하고, 십자군 운동으로 봉건기사

  계급이 급성장하여 봉건제도가 발전함.

  14C에 백년전쟁(1337), 흑사병, 농민반란등으로 고비를 넘기다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발달에 따른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관이 변화하고 전통 가톨릭 사상을 부정하는등 봉건체계가 흔들림. 이에 절대왕정체제를 형성하였으나

  시민혁명이 발생함.

  * 봉건제도란, 국왕을 정점으로 지배계급의 기사들이 봉토의 수수를 매개로 주종관계 맺는것으로 기사는 장원의 영주로 농민을

     지배하는 한편, 호출하면 부역의 의무를 수행. 그런데, 시행결과 왕권은 약해지고 지방분권화 진행

- 게르만 남하로 고대로마(서로마) 붕괴되고 상업과 교통이 붕괴하며 지역 중심의 폐쇄적 사회로 변화, 이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할 능력갖춘 기사계급들이 영주로 등장하여 상위계급층에 대한 쌍무적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자급자족 단위)"을 거느리며

  분권적 질서 구축

-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질서아래 모든 학문이 포괄되면서, 고대 인본주의가 쇠퇴하고,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발달한다.

- 교황권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게르만족들을 포교함으로써 결국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됨.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이 직접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게 되었음.

  그로인해 서방교회의 수장인 로마 총대주교(교황)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대립이 본격화됨.

  그 결과로 동서 교회 대분열(AD1054)일어나 서유럽은 교황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 동유럽은 그리스 정교회로 분리됨.

-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도시가 등장하고, 서유럽의 국가들은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 확립

  등으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이 되는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아비뇽 유수로 서서히 교황권 몰락하고, 마침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며, 서유럽에 비해 인본주의가 싹튼 선진문화인 비잔틴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를 꽃피움으로써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됨.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 중세시대"왕국의 시대" 또는 "봉건사회"로 왕권이 강화되어 기존에 강력했던 기독교와 교황이 조용해진 시기임. 왜냐면,

  교황 명령으로 십자군 원정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교황 권위가 실추되었고, 이때를 틈타 왕들이 세력을 키워 교황을 무시하고

  왕국들간 세력 다툼을 실시함. 이런 영향으로, 왕권을 더 위엄있고 강력하게 보이려고 "고딕양식"이 주를 이룸.  

         

         

 

          

       

AD 0481  프랑크 왕국 성립  :  메로빙거(메로베우스) 왕조  

             - 아틸라 사망(AD 453)에 따른 훈족의 쇠퇴와 기존의 강력한 경쟁자의 이탈  이후 클로비스 1세가 메로빙거 왕조 개창

             - 메로빙거 왕조 탄생은 서유럽 세계 형성, 그리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 지위 확립, 봉건제 성립에 중요한 영향요인.

             - 496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 AD 511, 클로비스 국왕 사후 게르만 관습인 분할 상속에 따라 동/중/서프랑크로 왕국 분열,쇠퇴.

             * AD 751,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허수아비 왕 힐데리히 3세 몰아내고 카롤링거 왕조 개창(국가는 그대로 왕조만 교체)

               (피핀왕은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시켜주고, 신의 권위까지 부여해준 교황에 보답하고자 기증을 통해 교황령 탄생하게 함. AD 754)

   

         

AD 0507  동로마 제국의 영토회복 및 전성기(6C)          

            

 

             * 슬라브족 ?  고트족 일부가 남아있던걸 슬라브족이라 부르게되었음.??

             - 6C중반 유스티아누스 1세가 동고트 왕국에게서 이탈리아를 되찾고, 반달왕국(반달족)에게서 북아프리카를 되찾고,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를 되찾아(AD 507) 영토를 회복함.   

             - 상업이 발달하여,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으나, 활발한 빈민 구호사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음.

             - 유스티아누스는 황제가 되기전에 삼촌이었던 황제에게 부탁하여 귀족-천민간 결혼을 가능하게 만들어 테오도라라는

               천민과 결혼하였음. 황제 즉위 이후 반란이 일어났을때, 지혜롭게 황제가 자리 지키도록하여 반란 잘 진압했고,   

             - 기존의 로마법을 정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도 건설하였음. 이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

               15세기(AD 1453) 이슬람제국이 이 곳을 점령하였을때 성당을 보존하고 이슬람 상징인 탑만 옆에 세움.

             *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까지 장악하고 비잔틴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여 11세기에 쇠퇴하여 영역이 축소됨.

    

        

AD 0610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화  : 비잔틴 제국의 시작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AD 324) 이후에도 동로마 지역은 서로마 지역과는 달리 로마 제국의 전통을 잘 유지했으나, 

               제국의 동서분할(AD 395) 이후에 장기간 평화, 지나친 중앙집중화, 토착문화 소멸등 점차 그리스화 진행. 

             - AD 610, 헤라클리우스 황제 재위와 동시에 제국의 공용어 및 군사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으며,

               황제명칭 또한 "바실레우스(그리스어로 임금)"로 바꾸는 등 7C에 이르러 그리스 색채를 완연히 띈 동방제국이 됨.

             - 이러한 변화조치로 후대의 학자들이 기존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고자 "비잔틴 제국"이라 지칭 하게됨. 물론 당시에는

               제국 스스로도, 아랍, 페르시아 등 적국들도 비잔틴 제국이란 용어는 쓰지않았고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로마제국으로

               인식했었음. 

               * 서유럽 국가들과, 역사학자들은 로마를 계승한 나라가 서유럽이라 하고싶었음. 히틀러 사용 문장이 로마를 상징.

               * "비잔티움 = 미로같이 복잡한"

             - 한편, 헤라클리우스 즉위 초기에 제국 변방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유라시아 유목민 아바르족이 트라키아와 발칸반도를

               공격했고,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611 ~ 616 사이에 터키 일부와, 시리아, 이집트를 빼았겼다. 하지만, 622 ~ 628년까지

               이란(페르시아)과 전쟁하여 제국의 영토를 회복했음.

             * AD 634,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에게 시리아, 이집트, 예루살렘이 차례로 함락당함.

             * 8C 후반 국력 성장하여 영토회복, 9C 이르러 그리스의 지배권 되찾고, 11C ~ 12C 비잔틴 제국의 번영의 절정기

             * AD 1024, 4차 십자군 원정으로 라틴 제국이 침공,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이후 57년간 지배함

               이로써, 로마제국의 역사가 단절됨.

             * AD 1261, 미카일 8세가 가톨릭 세력을 몰아냈지만, 과거 로마제국의 위상을 되찾지 못한 상태로 로마제국의 명맥유지

             * AD 1453, 오스만제국에 콘스탄티노플 함락되어 제국이 멸망함. 

                 

                 

AD 0634  아랍 제국의 비잔틴 제국 침공

             * AD 630, 마호메트가 아라비아 반도 통일하고, 이후 AD 632년부터 정통 칼리프 시대 개막

             -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 영토 확보전쟁과 7차 비잔틴-사산 전쟁 등으로 비잔틴 제국 자원 소모되있던 상태라 무슬림

               정복전쟁에 효과적 대처불가

             - 2nd 우마르 칼리프 통치기간 中  

             - AD 636, 시리아이집트의 부유한 지역이 함락

             - AD 637 예루살렘 함락     

                  

       

AD 0651  아랍 제국(3rd 칼리프 오스만)이  사산(왕)조 페르시아 정복

        

   

AD 0670  아랍 제국(우마이야 왕조)의 비잔틴 제국 침공

             - AD 0670,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 8C ~ 9C, 팍스 이슬라미카 시대에 아랍 제국(우마이야 왕조)의 비탄틴 침공 多

             - AD 0705, 6대 칼리프 왈리드 1세 즉위 & 8C초부터 비잔틴 침공으로 정복전쟁 시작.

             - AD 0710, 북부 아프리카 점령 

             - AD 0711, 서고트 왕국 점령

             - AD 0732, 프랑크 왕국이 아랍 제국 공격을 막아냄. 이슬람 세계로 부터 유럽 기독교 세계 지켜냄.

             

 

 

                    

                            

AD 0726  비잔틴 제국 황제(레온 3세)의 성상 파괴(명)령 (우상 숭배 금지령)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A%8C%EC%9D%98_%EB%8C%80%EB%B6%84%EC%97%B4#보편교회의_대분열

             - '성상'(이콘(icon))이라 함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함.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 로마가 동/서로 분리된 후(AD 395, 테오도시우스 사망),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왜냐면,

               서로마 제국은 476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타종교와 야만인들이 설치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동로마 제국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5~6세기를 통틀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국을 지켜내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간신히 동방 지역에서

               황제권을 수호할뿐, 서방 속주의 탈환은 생각지도못함.

               이러한 상황은 6세기 중엽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장하고서야 겨우 타개된다. 한편,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라틴 문화를 고수했던 황제였다. 그 이후에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화 하였다.

             * 7세기 들어 비잔틴 제국의 관심사는 동지중해 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미 게르만 계열의 야만족들에게 유린당한 서유럽의

               속주들은 그들에겐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化한 그들은 서방보다는 동방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고,

               당시에 강력한 적인 이란의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닥치게 되면서 동방에 집중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비잔틴 제국이 동방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간섭했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로마와 이탈리아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 사도 베드로가 

               가지는 의미 등으로 인해 동로마는 여전히 8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이탈리아 반도를 수중에 넣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동지중해에서 옛 로마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비잔틴 제국은 새로운 적인 이슬람 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들과 오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 630년, 메카 시(市)의 정복을 시작으로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632)하고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노린 이슬람, 그리고 거의 동시대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751, 피핀 3세, 카롤링커 왕조).

               이슬람이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다면,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썬 동서 교회의 대립에 서로마 교회(교황

               스테파노 2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미 이란과 이슬람을 상대로 한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서로마 교회가 독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프랑크 왕국은 두 개의 새로운 서로마 제국을 만들어냈다.

               800년의 서로마 제국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서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 덕분에 동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수도원 운동으로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야만족들을 개종했으며, 그 중 한 부족인 프랑크족(게르만족 일파)은 통치상의

               필요(라틴화 된 갈리아를 지배하는 데에 라틴 문명인 서로마 교회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로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 교회를 지켜주었다. 이것이 로마 교황이 동로마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고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 8세기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여 인기가 높아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2가지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공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성상 공경과 관련하여, 성상(이콘,icon)은 성인(예수,마리아,베드로 등)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써,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할때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그 성상

               들을 공경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이다. 성상 공경에 부정적이었던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에게 넘어갈 지도 몰랐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레온 3세가 적대시한 것은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대영지였다. 게다가 이 양자는 면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짐.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교리상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를 자처했고,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아니라, 이제 막 개종한 북방 야만족들의 힘을

               빌려 무력 행사로 황제에게 도전까지 한것이다.

 

             -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고,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동(당시 교황은 라벤나 주민들의 무장봉기 부추김).

               그러나 라벤나 총독의 군대는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격분한 레온 3세는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AD 0750  아바스 왕조 등장  : 아랍제국 → 이슬람제국化 , 시아파(4th 칼리프인 알리의 추종세력) 집권       

            

 

             

      

AD 0754  피핀 3세의 기증 : 교황령 탄생  

             * 역대 교황들은 롬바르드족의 침공에 대비하여 동로마 제국 황제와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해왔지만, 롬바르드족이 침공하여

                라벤나를 빼앗고 총독을 추방. 이에 교황은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도움 요청했으나 응답없어서 프랑크 왕 피핀에게 도움요청하였고, 피핀이 754에 이탈리아 침공하여 롬바르드 아이스툴프 쫓아내고 라벤나 총독령을 교황에게 바침. 이로써 프랑크 국왕과 교황간에 밀접한 관계 형성됨.

             - 기독교를 신봉하였기에 로마교회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교회 대주교는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교회에게 요구했고,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대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롬바르드족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동로마는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뻔뻔하게)했으나, 피핀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롬바르드족과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성 베드로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즉 그의 후계자인 로마 대주교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다(754, 피핀 3세의 기증).

이로써 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유)착되었으며, 비잔틴 제국과 결별하게 된다. 

             - 프랑크 국왕 피핀이 자신의 왕위를 교황 자카리아에게서 승인을 받았고, 후임 교황인 스테파노 2세가 롬바르드 국왕의

               압박을 받아 구원 요청해 온 데 대해서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상함.

               이것이 피핀의 기부이며, 이후 종래의 베드로 세습령에 부가해서 기독교의 교황령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 교황령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EB%A0%B9 : 교황령

                   - 교황령이란 교회령(敎會領, 라틴어: Status Ecclesiasticus) 또는 베드로 세습령(世襲領, 라틴어: Patrimonium

                     Petri)이라고도 부른다. 754년 피핀의 기증 때부터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멸망, 합병되기 전까지, 천 년 넘게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 후 교황령은 사실상 멸망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나,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도)시국(가)을 건국,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 회복.  

        

                    

AD 0800  로마 교황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임명  :  신성로마제국의 시작

             * 비잔틴 제국 황제 레온 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726) 이후 동방/서방 교회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 프랑크 국왕에게 종속적인 태도를 갖고있던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샤를마뉴) 1세(프랑크왕국 2대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2대 국왕)에게 (황)(의 ) 씌워주며 무릎꿇어 고대 황제 대관식 관행에 따라 신하의 예를 갖추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한 이래 3세기 동안 공석이었던 서유럽 제국의 부활(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을 선언했다.  

             - 이것은, 로마 교황이 정치적 뒷배를 갖게 되고, 카를루스 대제는 신으로터 자신의 제국을 인정받는 상호 윈윈전략임.

             * 하지만, 이로인해 종교적 논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동서교회로 분열됨(1054).     
동로마 황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3세'가 어떤 명령을 내리는데, 그것은 성상 숭배 금지령이었다. 이때, 성상은 성스러운 상을 의미한다. 예수나 마리아, 베드로의 상이다. 그 이유는 율법에있다.
십계명에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우상숭배를 금지한다. 비잔티움 황제의 논리는 그런 성상이 우상숭배로 여겼던 것이다.
서로마 교회의 교황은 이런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성상숭배는 오랜 관습이었다. 게르만에게 포교할 때,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이러한 성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던 욕심도 있었다.
성상 숭배 금지를 놓고 동교회와 서교회가 300년 동안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 과정에서,
800년 크리스마스날 로마 교황은 서로마 황제로 카를루스 대제를 임명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 교황은 정치적 뒷배를 가지는 것이고, 카를루스 대제는 신으로부터 자신의 제국을 인정받는, 서로 윈윈하는 전략이었다.

이를 알게 된 동로마 황제는 굉장히 화가 났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 논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1054년에 동서 교회가 서로 분열된다. 서쪽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 카톨릭 교회, 동쪽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양쪽 교회가 생기게 된다.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로마 문화,게르만 족의 문화,로마 카톨릭이 묶인 서로마 문화,
그에 비해서 동로마는 동로마다운 특징을 가져가면서,
로마 카톨릭,크리스트교가 아닌
그리스 정교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이 1000년 동안 유지가 된다.      

     

           

AD 0962  신성로마제국의 부활??????

             - 다민족 영토 집합체, 대부분 독일계. 주요 왕국은 독일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외 군소 공국

             - 오토 1세가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 자처하며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황제의 제관을 받아 서유럽 제국을 부활시킴

       

     

AD 1055  셀주크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 지배      

            

           

AD 1054  (보편)교회의 (동/서) 대분열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A%8C%EC%9D%98_%EB%8C%80%EB%B6%84%EC%97%B4#보편교회의_대분열

            

 

 

 

             * 크리스트교가 로마제국 초기에 크게 박해받다가 국교로 공인된 후 크게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5개 교구, 5개 지역의

               교회등장. 그러나, 7~8세기 지나면서 남쪽 3개지역(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크)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게되고

               결국 로마교회와 비잔티움교회만 남개됨.

             * 서로마 멸망(476) 후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쪽 교회에도 황제로서 정치적 영향력 행사하고 싶었고(성상 파괴령),

               하지만 서쪽교회 수장은 그게 싫어서 본인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자라 자칭하며 교황이라 불렀고, 정치/군사적 뒷배로

               만들기 위해서 당시 성립된 프랑크 왕국과 친밀관계 유지(피핀 기증, 교황령 탄생)

             - 4C부터 이어져온 공교회(보편교회)가 11C에 이르러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상호 파문으로 분리됨. 서쪽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한 로마 카톨릭 교회, 동쪽 교회는 비잔틴 제국 중심을한 그리스 정교회 탄생.

             - 동방교회 시각에선 5개 대교구로 구성된 단일 기독교 공동체에서 로마 대교구인 로마 교회(서방교회)가 이탈한것이며,

               서방교회 시각에서는 로마 교회와의 일치에서 동방교회 공동체들이 이탈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보편기독교 시대에 프랑크 왕국과 연합하고자 하는 로마 교회가 보편교회를 주창하는 비잔틴 제국 중심의 5개 지역

               연합체 교회의 치리에서 종속관계를 끝내고 교황주의를 강화하며 이탈한 것으로 본다.

             * 서방교회 vs 동방교회 주요 건축물

              

 

               - 서쪽 교회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이다. 고딕양식이라는 이름은 게르만 족의 하나인 '고트 족'스럽게 지었다라고 해서

                 유래된 것이다. 고트 족은 야만인이라고 여겨졌다. 당시에는 돌을 쌓아서 만든게 너무 촌스럽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고딕 양식은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운데 십자가를 그어놓고,그 위에 건물을 세운다. 내부 공간이 크면 클수록 좋고, 당시 전기가 없어서 빛이 많이 들어

                 오도록 벽을 얇게 하고, 중간에 기둥을 두어 만들었다. 가장 큰 특징은 뾰족한 첨탑이 있고, 지붕의 하중을 받지 않아

                 많은 장식을 할 수 있다. 유리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장식도 가능했다.

              - 동방 교회 건축양식은 큰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에 좌우가 똑같은 십자가를 그어서 그 위에 건물을 올린다.
                 40여 개의 창문에서 햇볕이 쏟아 들어가고,안에  보면 통으로 다 트여있다. 2층에는 황금 모자이크가 있다.

                    

           

AD 1066  노르만인의 잉글랜드(앵글로색슨) 침공 

             *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A5%B4%EB%A7%8C%EC%9D%B8 : 노르만인

             - 노르만족은 8C 북유럽해안을 자주 습격한 스칸디나비아 출신 야만족. 9C 후반 프랑크왕국 북부 센강 유역(노르망디)에 거점마련.

             -  911년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가 노르망디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고(노르망디 공국), 가톨릭으로 개종, 프랑스어 사용

             - 이후 윌리엄 1세의 노르만이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를 침공/정복. 이후 앵글로색슨인의 계속된 저항을 제압, 왕위를 안정(1072~) 

             -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노르만 정복자들과 앵글로색슨족은 완전히 잉글랜드 귀족으로 동화됨.

             - 이후 비잔틴제국의 대 셀주크투르크 전쟁에도 참가했고,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함.

         

         

AD 1071  셀주크 제국의 침공  :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 상실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이 패배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소아시아) 지역을 상실함.

             -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교를 신봉한 셀주크 왕조(3대 말라크 샤)에게 아나톨리아 반도를 빼앗김. 이로써, 아나톨리아 반도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터키/이슬람 세계로 무대가 바뀜.

             - 한편, 비잔티 제국의 황제인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전쟁에 패배하여 투옥당하고

             - 셀주크 제국에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을 차례로 빼앗김.

             - 이러한 이슬람 세계의 발전이 유럽 크리스트교 세계에 충격을 주고, 긴장하게 만들어, 십자군 원정 준비하게 됨.

                    

       

AD 1077  카노사의 굴욕 : 교황권의 정점

            

 

             - 정점에 달한 교황권(그레고리우스 7세)과 추락한 왕권(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의 충돌

             - 주교 서임권(고위 수도사, 즉, 주교를 임명하는 권리)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있었으나 교회 세속화를 우려했던

               당시 교황과 서임권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하인리히가 자신의 지역의 주교를 마음대로 임명함.

               (황제가 임명한 주교 사망시, 교회 재산이 국가로 환수? 이에 교황이 서임권 자체를 황제로 부터 뺐으려 함)

             -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면하고, 밑에 있던 성직자들도 파면해버림.(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 세력과 동맹을 맺어두었던 상태). 그러자 불안해진 당시의 권력을 받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교들은 교황의 편에 서게됨.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을 당하고 자신의 신하 귀족은 물론이고 독일의 성직자들도 등을 돌리는 사태에 직면한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교황에 굴복하고, 파문조치를 철회받기 위해서 이탈리아 북부를 순방중인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알프스의 카노사성으로 향했습니다.

1월 혹서기에 맨발로 무릎꿇고 3일 밤낮으로 빌어서 교황의 용서를 구함. 

그레고리우스7세와 하인리히4세 두 사람은 1077년 1월에 카노사성에서 만났습니다. 하인리히4세는 사면을 구하는 참회자다운 모습으로 맨발에 참회복 차림으로 나타나 알프스의 눈 속에서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애걸했습니다.

그 해 알프스산악지대는 중세 전체를 통틀어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이런 날에 일국의 왕, 아니 로마제국을 계승한 것으로 인정받은 제국의 황제가 용서를 빌기 위해서 단신으로 교황 앞에 머리를 조아리다니요!! 96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제국으로서 - 실상은 전형적인 봉건왕국이었지만 - 자처해온 나라의 수장이 교황 앞에 사죄를 구하는 그 모습은 교황권의 왕권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문에서 풀려난 하인리히는 귀족들을 회유하는 등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파문 취소되어서, 충성파는 다시 하인리히 중심으로 집결).  한편 교황의 하인리히 사면에 불만이던 교황측 주교들은 하인리히에 맞서서 루돌프를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로 선출했습니다.

 

그리하여 독일은 일시적으로 내전상태에 빠졌지만 하인리히는 루돌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망설임 끝에 루돌프를 지지하여 하인리히를 재차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지만, 바로 그 시점에 교황이 지지한 루돌프는 전쟁에 패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인리히와 그레고리우스7세 사이의 관계는 역전이 되었습니다. 불리해진 교황에 대해 공세를 취한 하인리히는 대립교황을 임명한 뒤에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습니다. (당시 노르만은 동로마를 침공하려고 해서, 이를 기회로 하인리히가 로마를 공격함)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에서 대립교황이 집전하는 장엄한 대관식에서 하인리히가 빛나는 황제의 관을 쓰고 있을 때,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베드로성당에서 불과 몇 KM떨어지지 않은 요새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노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광폭한 노르만인들은 로마를 약탈한 후 교황을 데리고 자신들의 땅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몇달 뒤에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고위성직자의 서임권을 차지하기 위한 속권과 교권의 싸움은 그레고리우스7세와 하인리히 4세의 다툼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레고리우스7세의 투쟁은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확립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주장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종교적 문제에 관한 기독교세계의 최고지배자로서의 교황의 지위가 강력하게 천명되고 또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후계자들도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작업을 계승했습니다. 1122년에 마침내 칼릭스투스2세와 독일황제 하인리히 5세의 타협으로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성직의 상징인 반지와 목장을 주교에게 수여하는 관행을 포기했고, 교황은 황제가 주교에게 세속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곧 국왕이 주교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주교는 국왕의 봉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사실 독일의 경우 황제 임석하에 성직자의 선거가 실시되는 등 아직 교황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을 포기한 것은 프랑크왕국 이래 속권우위의 전통 - 그동안 교황과 교황청은 프랑크왕실의 비호 아래에 이교도 야만족들의 위협 속에서 그 권위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었지요 - 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름스 협약>은 다른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양 세력의 타협으로 서임권투쟁을 끝맺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AD 1092 

룸 셀주크 왕조 등장

            

 

   

  

AD 1095  십자군 전쟁 : 원정(1차) 

             * http://daddymoo.tistory.com/539 : "위도 10도"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http://blog.daum.net/burungpp/13744915 : 십자군 원정 내용과 영향            

             * 1081년에 재위한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Alexius I Comnenus, 1081~1118)는 1086년에 여러도시를 빼앗기는 등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지경임. 위기를 느끼고 제국을 위협하는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려고

               서방을 끌어들이기로 함.

             * 결국, AD 1096년에 무슬림들이 성지순례하는 그리스도 교인을 탄압한다고 과장된 주장을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지원 요청했고, 이에, 교황은 민중과 그리스도 교회를 선동하여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어 전쟁이 발발함. 이것이

               '십자군 전쟁'의 시작임(1096).

               알렉시우스가 원하던 원치 않았던, '십자군' 은 힘든 여정 끝에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약 200년동안 시리아

               지방 일부에 그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 But 셀주크 투르크는 내분중이었고 동쪽에서는 서요의 침략을 받아 약해진상태여서 타격컸고,

               같은 투르크인인 호레즘에게 망함.

             * 셀주크 투르크(or 호레즘?)는  훗날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뿔뿔이 흩어졌음.  

             - 성지,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유럽 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원정전쟁이며, 성지를 지키자는 교황의 호소에 각국의 제후들이

               호응하여 일어남

- 비잔틴(동로마)제국의 구원요청을 잘못해석하여 제국을 압박해오는 이슬람세력(오스만 왕국)에

  맞선전쟁으로 번저감.

  * 그리스도(야훼) 신봉 기독교(카톨릭,개신교)인의 십자군  vs  알라 신봉 이슬람교인의 지하드

                 [프랑크인]                                                       [셀주크인:투르크족 일파]

  * 당시의 이슬람 세계

     : 서구의 왕위계승 제도와는 달리,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하는 술탄제도 때문에 단합불가

       이후에, 15세기경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성립되어서야 안정되찾음.

- 8차례에 걸친 유럽에서 서아시아로 원정침공.

- 결국 회교도인(이슬람교 신봉자, Muslim)인들이 성지를 반납하고 물러나 전쟁 종료.

- 이슬람과 유대인들에 대한 학대 심화됨.

- 세계는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감.

 

             -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 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며, 전쟁 참가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 

             - 이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와 문명의 충돌. 서양의 중세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전쟁

             - 표면적 명분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복한 튀르크족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제국에 군사원조였지만,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목적중 하나는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1054년 동서교회 분열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그리스 정교회)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합하여 자신이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것이었을 것임.

             - 전쟁배경은 교황과 유럽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된 전쟁

             - 당시 영주의 장남만 상속권 있었고, 이외의 아들들은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 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에 대한 요구 많았다. 안전한 성지순례의 종교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어우러져 십자권 원정 필요성 대두

             - 당시 이슬람은 "술탄" 제도 때문에 분열되고 단합이 안되어있었음.그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쳐 이르는 중동지역에 4개의 십자군 국가(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곡,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들이 세워짐.

               하지만,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1099) 후, 이슬람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포로 학대. 이로써 이슬람이 단결하게되는 계기가 됨.

             - 결국 성지회복 실패하고, 십자군은 타락하여 중세상인에게 돈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전락,

             -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독단적인 의도가 강해, 전쟁패배후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중세사회 영주의 몰락을 초래함.

             - 셀주크 상태는? 술탄제도 때문에 시끄러웠나?

             - 1차 십자군 원정으로(1096) 룸 셀주크는 수도인 니케아 뺏기고, 코냐로 수도 이전

             - 1099년에 예루살렘도 뺏김

    

    

AD 1147  십자군 원정(2차)

             - 프랑스 루이 7세,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2세 중심으로 십자군 결성, but 통제안된. 결국 패배

       

AD 1187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에게 90년만에 예루살렘 뺏김.

 

AD 1189 

 

AD 1204  십자군 원정 (4차) 

             -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4차 십자군 소집(1200). 주로 프랑스에서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

             - 십자군은 7월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는데, 십자군의 횡포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에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라틴인:서유럽인)을 세움.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 변질되었음을 방증함. 더이상 순수한 성전이 아닌 침략전쟁임. 

               * 라틴 제국???

      

  

AD 13C   13C초 세계지도????          - 진, 송 시대 확인해서 연도 정하기

            

 

       

      

AD 1219  몽골의 호라즘 침공

             

    

AD 1223  칼가강 전투 :  러시아  vs  몽골제국 

             - 몽골제국의 러시아 지배 시작을 알린 전투, 몽골제국의 출현

             - 몽골제국(AD 1219 ~ AD 1478)의 유럽세계 공격, 몽골제국시대(AD 13C ~ AD 14C)    

             - 몽골제국이 AD 1221에 호라즘을 정벌하고 AD 1223에 러시아와 칼가강에서 첫 전투 벌임. 남러시아의 카프카스 함락

    

    

AD 1235  몽골 제국의 러시아 공국 재침공         

            

 

 

 

             *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339774

             - 금나라 정복, 남송과 동맹맺고, 서방으로 원정계획

             - 몽골제국 3세들이 수행. 사령관 바투(무능함)와 조력자 수부타이(말없이 우직하게, 능력있고)

             원정가는길에 킵차크족 정벌

             - 1236년에, 볼가강 건너 (예전 칼가강 전투때 패배시켰던) 러시아 공국들을 공격

             - 1238년에, 블라디미르 함락. 러시아 대공 유리 2세 사망.

             노브로고로드 공화국은 무능한 바투가 어물쩡거리다 "라스푸티차(봄에 땅이 녹아 질척거리게됨, 몽골 기병대 취약)"때문에 살아남음

             - 1239년, 수부타이가 북부 러시아 점령후 다시 남하하여 키예프 공국 박살냄(함락, 1240)

               이후, 러시아 대공들이 도망치는거 따라가면서 폴란드, 헝가리등 순서대로 함락당함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러시아 난민 찾아와 기독교 개한다고 받아달라하니 교황한테 잘보이는데 기회로 삼았고, 무시무시한

               몽골군 처들어 온다고 조심하라했는데, 훈족 후예라면서 개무시하다가 완전 박살남

               이후 3백년에 걸쳐 "타타르의 멍에" 조공해야하고, 복종해야하고

             * 이러한 몽골대학살로 르네상스의 손길도 못닫고, 표트르 대제의 개혁전까지 낙후지역으로 남아 발전 더딤

                분열되고 갈등많다가 와신상담하여 모스크바 공국아래로 통일되어 발전시작함

             - AD 1242, 수부타이의 몽골군이 독일과 폴란드의 기사연합군을 발슈타트에서 깨부심, 이후 독일동부 침입하지않고,

               남쪽 헝가리로 방향을 바꾸어 AD 1241에 헝가리를 완파시킨 작전부대와 합류하여 헝가리에서 지배 기초를 구축함.  

             - 1242  오고타이 칸(칭기즈 칸 후계자)이사망하자, 몽골군은 진격 포기하고 수도 카라코룸으로 철수

              

 

AD 1259  몽골의 바그다드 대학살

                                       

 

AD 1271  십자군 원정 (8차, 9차)

             - 맘루크 왕조(1250~)의 5대 술탄인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침공하여 파괴)시킨것이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했고,

               프랑스의 루이 9세가 8차 십자군 일으킴. 풍토병으로 십자군 초토화되고 루이도 사망해서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복귀

             - but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및 소규모 수행단마 남아서 싸움. <- 이것이 9차 십자군

                에드워드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 체결후 잉글랜드로 돌아감.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종료됨.

                                

                              

AD 1310  원+3한국 연합체 성립

             

 

   

  

AD 1326  오스만 제국의 부르사(비잔틴 지방도시) 침공

            

 

             * 1299에 룸 셀주크로부터 독립하여 성립된 오스만 왕조가 부르사를 함락함.

             * 적색 부분 : 오스만 제국 초기영토 (주황색은 룸 셀주크 영토), 점선 부분 : 2대 술탄 오르한 1세 시절 영토(1361)

             - 2대술탄, 오르한 1세가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부르사 함락 완료, 수도이전

             - 오스만 1세가 단순한 군사집단이었다면, 오르한 1세는 본격적인 국가체제 갖추기 시작

             - 이후,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차례로 점령        

                                  

                 

AD 1337  백년전쟁 (~1453)  :  영국  vs  프랑스

             * https://namu.wiki/w/%EC%97%90%EB%93%9C%EC%9B%8C%EB%93%9C%203%EC%84%B8

             - 14C ~ 15C 중세유럽의 가장 유명한 전쟁중 하나, 서유럽의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6년에 걸쳐 싸운 전쟁

             - 기사 최고의 전성기이자, 기사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국민정체성이 싹트게 된 계기

             - 노르만인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침공(AD 1066) 이후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땅에 보유한 영지에 대해 프랑스 국왕의 제후였음.

             - 프랑스는 이들 영지를 잉글랜드에게서 빼았아 잉글랜드 세력을 유럽대륙에서 축출하고 싶었음. 그래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랑 전쟁이 일어날때마다 그 시도를 실행에 옮김. 

- 에드워드 3세는 부군인 에드워드 2세와는 달리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위 이전에 에드워드 2세의 잘못된 국정운영으로 스코틀랜드를 독립하게 만듦. 

             - 1339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고 카페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였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왕위계승을 주장했지만 살리카 법으로 모계 계승을 인정받지 못함. 이에 백년전쟁 촉발시킴. 초기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은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으로 프랑스 침공 발판 마련하는등 잉글랜드 우세, But 프랑스 국왕의 동원력으로 결국 프랑스가 승리하고, 잉글랜드는 프랑스 지역의 영토를 all 상실함.

             - 전쟁의 시작은 왕가의 전쟁이었지만, 전쟁과정을 거치며 평민들에게 국민의식을 싹트게했고 상비군 부활을 촉진시킴. 전쟁결과로,

               프랑스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내 영지 상실로 장미전쟁(1455~1487)이라는 내분이 발생함.

https://seven00.tistory.com/879 중세/근대 전쟁

백년전쟁 말기에 프랑스가 화약때문에 이겼나?                  

 

 

- 무력으로 리처드 2세의 권력을 찬탈한 뒤, 왕좌의 정당성에 대해 계속 고뇌하면서도 왕좌를 노리는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적인  헨리 4세

-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결국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던 헨리 5세

 

 

 

 

===============  오스만의 유럽 침공 묶음처리  ==================================================================

               

AD 1366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침공

            

 

             - 3대 술탄인, 무라드1세는 비잔틴 제국의 불안을 틈타 불가리아 제국을 속국으로 만듦 

                    

               

AD 1371  마리차강 전투 : 세르비아 왕국  vs  오스만 제국

             - 불가리아의 오스만 속국화를 보고 세르비아는 불안을 느낌

             - 1350년경 세르비아는 발칸반도 최강대국이었으나 스테판 두샨 사후 세력 줄어든 상태

             - 결국 세르비아의 대패, 부카신(세르비아 왕) 전사 => "세르비아인의 파멸"이라고 불림

             - 발칸반도의 주요길목인 마리차강

 

        

AD 1389  코소보 전투(1차)  :  세르비아 왕국  vs  오스만 제국

             - 세르비아 ▷◀ 오스만(무라트 1세 &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

             - 세르비아는 1371년 마리차강 전투에서 국왕 부카신의 사망으로 왕조가 단절되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상태였음.

             - 라자르 흐레벨리아노비치 중심으로 보스니아의 일부 지원을 받아 오스만과 격돌 결심

             - 전투중 오스만의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귀족에게 피살되었지만, 그를 수행하던 아들 바예지드 1세가 즉시 즉위하여 적극적인 원정을 계속하여 발칸반도의 강국 세르비아에게 완승했으며, 보스니아 왈라키등도 굴복시켜 오스만 제국이 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함.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장악의 중요한 분기점

             -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여러 성채를 쌓았음.

 

 

AD 1393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

             이듬해인 1394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십자군 소집선언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교황호소에 응답하여 결성 성공하여 헝가리 왕이 지휘함.

             많은 프랑스계 귀족들이 합류

             다뉴브 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지만

             9/25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 대파하고 3천명 포로로 잡아감

  

  

AD 1394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침략 재개(4대 술탄, 바예지드) ???

             -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하고 비잔틴제국은 서유럽에 원군 요청

             -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십자군 결성 선포()

               * 십자군 목표 : 발칸에서 오스만 축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거쳐 예루살렘까지 진군

             - 파병 젤 많이한 프랑스가 지휘권 장악하여

            

           

AD 1396  니코폴리스 전투 : 니코폴리스 십자군  vs  오스만 제국

             - 오스만 제국(바예지드 1세)이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를 침공함 :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 오스만의 발칸반도 재공격 :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격

             - 위기의 동로마제국은 서유럽에 십자군 파견요청하였고,

             - 교황승인 아래 중세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니코폴리스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 참가국 : 헝가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왕국, 구스위스 연방,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

             - 목표 : 오스만을 발칸반도에서 축출, 아나톨리아, 시리아 거쳐 예루살렘 탈환            

             - But 결과는 오스만(with 세르비아)의 승리

             - 바예지드 1세는 카이로의 맘루크 왕조 보호하에 있던 칼리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술탄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AD 1453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 비잔틴 제국의 멸망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asmanic&logNo=220910093406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점령 당함)

             * http://wideways.tistory.com/86  : 콘스탄티노플 함락-위대한 문명의 비참한 종말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mir98&logNo=60199481282  :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지도             

             -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침공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 => 명칭이 이스탄불로 바뀜 (기독교 => 이슬람교)

             - 삼중성벽은 유럽에서 최강의 방어력이었다. 오스만이 몇차례나 함락 시도했다.

             - 패전원인

               1) 유럽국가들의 무관심

                   : 영/프) 100년전쟁 후유증으로 탈진, 독일) 제후들간 세력다툼, 이태리 도시국가s) 내분

                     그리스&세르비아지역) 이미 오스만 영토, 헝가리&폴란드) 얼마전에 바르나에서 패퇴

               2) 주스티아니(용병대장) 도망 -> 대항군 사기저하

             - 이후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 기반으로 레스보스, 키오스섬, 펠로폰네소스반도, 오스트리아 빈까지 확장

                또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중해 수많은 섬 차지했으며, 그리스 세계 지배함

             -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지배로 수많은 그리스의 지식인이 유럽으로 이주해갔고, 르네상스 발흥에 영향

             - 한편, 평야지대에 살던사람은 산지로 숨어들어 정착, 그리스 정교회로 민족적 유대감 지켜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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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455  영국의 장미전쟁(~1485)

             * http://cafe.daum.net/ASMONACOFC/gAVU/1054448  : 장미전쟁의 시작 (에펨코리아)

             - 전쟁 결과로 많은 제후와 기사가 몰락하고 튜더 왕조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장미전쟁의 구귀족

               중에서도 왕권에 대하여 반항적인 부분이 거의 모두 괴멸해버림. 이것은 헨리 7세의 국가 재건사업을 용이하게 만듦.   

                    

 

 

                    

 15C말 신항로 개척 : 근세(전기 근대)사회의 시작 (~18C中)   

* https://tip.daum.net/question/51227197?q=%ED%8F%AC%EB%A5%B4%ED%88%AC%EC%B9%BC+%EC%9D%B8%EB%8F%84%EC%8B%9D%EB%AF%BC%EC%A7%80 : 식민주의

- 서구 문명에서 근대는 과학적 방법을 발견하고 모든 지식에 적용하여 前근대 사람들이 믿던 미신을 내던져버린 점진적 전환기.

  반면 산업혁명 후 기계가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상실,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하면서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 일으킴  

- 유럽권 국가들은 호시절이었겠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비유럽권 국가들에겐 고통의 시기 

- 헤겔은 '근대'를 종교개혁, 시민사회, 계몽 등에 의해 특정되는 시대라고 바라봤다

- 전기 근대(early mordern period) : 동양에서는 "근세"로 번역됨. 16C초 유럽의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로 시작됨.

- 후기 근대(late modern period) : 18C중반 7년전쟁, 프랑스혁명, 산업혁명으로 시작, 19C ~ 20C 중반 (1945 2차대전 종료)까지도 본다

- 근대 : 산업혁명(18C중반 ~ 19C초반) 이후, 왕정이 끝나고 전개되는 시대로써, 개인 의식과 자본주의 및 시민사회 성립이 특징임. 왕정사회를 극복한 근대사회는 개인을 존중하며,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가진다.

- 근대시대"제국의 시대",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체제, 기계문명의 문화가 빠르게 퍼져,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한편, 각국가들이 식민지전쟁을 벌이며 전세계에서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일어나는 시기입니다.이시기에는 왕이 아니라 국민들이 성원하는 조국, 자신의 제국을 더 강하고 기계문명이 문화화 되면서 보다 복잡하고 실용적인 모더니즘양식과 함께 영국의  빅토리아양식 등이 유행했습니다.

- 왕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변화   

- 신의 섭리를 기준으로 가치관과 사회가 구성된 시기를 중세로 본다면, 시민이 주체로 등장하는 시기가 근대로 본다. 프랑스혁명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의 근거

- 한국사에서는 1876 개화부터 1945 광복이전, 일본사에서는 메이지 유신(1868년)에서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1945년)까지를 근대로 간주한다. 중국사에서는 신해혁명(1911년)부터 시작된다.

        

  

AD 1488  포르투갈의 희망봉 발견

             - 포르투갈 엔히크 왕자의 해외진출 

             - 지중해 세계의 입장에선 변두리였던 포르투갈. 토양도 척박하여 농사도 안되고, 상업밖에 할게 없었고

             - 자연스레 대서양과 아프리카로 관심가지게 되었다.

             - 엔히크 왕자의 아프리카 항로 개척 <--  인도 항로 개척의 견인차

             - 결국 아프리카 희망봉 발견

 

      

AD 1492  스페인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식민지 개척)

             - 스페인은 대서양에서 세력싸움좀 했는데 오스만이 진출하는바람에 세력확장에 제동걸림. 오스만과 대결하긴 벅차서 신항로 필요.

             - 유럽↔아메리카 항로 개척

             - 혹자는 이를 중세/근대 구분기준으로 본다. 왜냐면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이 신항로 개척(식민지 개척) 시작함.

대항해시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상륙과 카리브 지역 탐험을 마치고 몇 명의 원주민들을 납치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원주민들의 존재를 확인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신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항로의 등장은 그들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 결과 국가 단위의 탐사경쟁이 벌어졌고 곧 이는 국가 간의 충돌을 야기했으며          

                                  

                                 

      

AD 1517  루터의 종교개혁

  

  

AD 1521  에스파냐 아즈텍 정복

             - 중앙아메리카(멕시코~파나마) 차지        

  

   

AD 1566  오스만 제국의 최대영토

            

 

            

      

AD 1580  에스파냐

            

 

             -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이 됨

     

   

AD 1588  스페인 무적함대의 대패  by  영국 해군

             * http://blog.daum.net/anbh5127/2083  해전 외 세계의 전쟁사

             - 당시 영국은 오스만, 에스파냐에 비하면 초라한 국가였음. 영토도 잉글랜드와 웨일스만 보유(스코틀랜드는 독립왕국)

             - 에스파냐가 사활을 걸고 진압하려했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잉글랜드가 지원, 가톨릭 교도인 펠리페 2세의 에스파냐와는 달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하에 성공회 노선을 확실히한 잉들랜드.

- 잉글랜드는 성공회로 전환되면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왕실의 재정수입으로 사용했으나 해상력 유지에는 턱없이 부족

             - 1596 영국 승리

             - 1597 영국 승리

             - 결국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을수 있었음.

   

        

AD 1600  동인도 회사 설립

             * https://namu.wiki/w/%EC%98%81%EA%B5%AD%20%EB%8F%99%EC%9D%B8%EB%8F%84%20%ED%9A%8C%EC%82%AC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만들었던 아시아 무역 회사. 이름은 무역 회사지만 회사의 수장이 식민지 총독을 겸하였으므로, 현대의 무역 회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완전 독점하고, 회사 영토 내에서의 사법 및 치안권은 물론, 제한적인 외교권 및 군사행동권(현지 용병을 고용 등)까지 갖고 있는 사실상의 총독부였다

             - 동인도 회사의 설립이 신항로 개척시대의 종료?? 왜냐면, 이후 유럽 열강들간에 식민지 따먹기 시작, 근대 제국주의의 시작

             - 1600,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9C에 대영제국을 있게 한 회사.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영향력 행사할수 있었다. 경쟁자였던, 네델란드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의 격전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음.

             - 1602, 네델란드가 동인도 회사 설립, 영국꺼 보다 규모 훨씬 컸음. 중국, 인도, 일본, 페르시아, 실론(스리랑카)과의

               교역중심지로 자바섬에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건설하여 식민제국 급속히 발전

             - 이후 프랑스(1604), 포르투갈, 스웨덴도 동인도 회사 설립

             * 일본이 이를 본따 조선의 무역을 독점하려 부산에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흡수됨

   

          

AD 1640  포르투갈의 독립 from 스페인

             - 포르투칼이 보유중이던 인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상실함    

        

     

AD 1756  7년 전쟁  ;  포메라니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 전쟁을 근세로 봐야할까 근대로 봐야할까, 제국주의에 기인한 열강들간의 식민지 뺏어먹기 게임이면 근세??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sred7&logNo=80170152879

             * https://ko.wikipedia.org/wiki/7%EB%85%84_%EC%A0%84%EC%9F%81 : 위키피디아

             * https://blog.naver.com/donglm/221599602275

             - 18세기 대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뺏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서 뺏긴 영토를 되찾겠다고 벌인 전쟁이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상실하게된 전쟁임.

             -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동맹을 파기하고 프로이센으로 갈아탄 영국의 도움으로 프로이센이 승리

             -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이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공격하고, 프랑스 선박 나포하여 완전히 제압했다. 이에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캐나다의 퀘벡 주를 빼앗았다.

             * 한편, 영국이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막대한 재정난을 격게 되었고, 이를 식민지 세금으로 충당하려했다. 

               1765  인지조례,  1773 차조례

             * 그래서 13개 식민지 반발 거세짐. 결국 보스턴 Tea-party 발생 (AD 1773).

             * 영향으로 미국 독립전쟁 발발 (AD 1775)

             

 

             * 18C 북미대륙 차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배경???  라스트 모히칸

            

  

             

  18C中  산업혁명 : 근대(후기 근대)사회의 시작  ( ~ 20C中)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bely&logNo=221077622235 : 세계 근현대사 사진     

* http://cafe.daum.net/hansung-sports/F6T2/10511?q=%EC%84%B8%EA%B3%84%20%EA%B7%BC%ED%98%84%EB%8C%80%EC%82%AC 근현대 5 회담

- 18C중반부터 영국에선 면의 수요가 급증하고, 이에따라 신속,대량생산에 집중하기 시작, 결과로 사람손을 대신할 기계 발명됨.

- 기계동력이 수력/풍력에 의존해야해서 공장을 물가에만 건설. 와트가 증기기관 발명 → 에너지 원료인 석탄산업이 발달 → 기계제작관련 제철산업 발달 → 대량생산된 재화 판매를 위해 증기기관차 발명되면서 철도산업 발달, 유럽에 철도 건설 Boom. 이렇게 순차적으로 관련산업들이 폭풍성장, 혁명이 일어남

- 이렇게 19C 중반에 영국은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경제대국이 됨. 

- 영국에서 산업혁명 일어난 이유 :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이 도시노동자로 대거 투입되었고,석탄등의 자원도 풍부했음. 식민지 많아서 판매가 잘됨. 식민지 때문에 자금력도 좋고, 명예혁명 이후 사회가 안정되어 경제발전에 집중가능.

- 산업혁명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 심해지고, 노동자는 힘든노동환경속에서 장시간 중노동 해야했음.

   농촌에서 밀려드는 인원을 수용할 시설. 인프라 부족했고 이에 질병으로 고통받음.

- 19C 유럽에는 민족자결주의 등장

 

      

    

AD 1760  방적기 발명  :  산업혁명의 시작

             - 산업혁명이란, 1760년 ~ 182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공정으로의 전환, 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경제등의 큰 변화를 일컫는다.

             - 18세기에 들어서자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여,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해 대량생산이 시작됨. 이것이 산업혁명 출발점.

                그 후 면직물 공업이 산업혁명 주도하였고, 무수히 많은 기계가 발명되었으며, 기계가 생산을 지탱하는 중요 역할 수행.

             * 영향으로, 왕족과 귀족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 등장. 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전환. 공업화에 따른

                농촌인구의 도시 유입. 석탄 사용 증가로 공해 심각, 과밀인구로 도시환경 불결해짐. 노동자의 인권유린 시작.

        

   

AD 1773  보스턴 Tea Party

             * 영국이 7년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게되자 식민지에 과도하게 세금을 거둬들임

             - 이에 반발 일어남

             * 영향으로 미국 독립전쟁 발발

      

     

AD 1775  미국 독립전쟁  

            

 

             - 보스턴 tea party 사건으로 영국이 보스턴 항 폐쇄, 직접통치

             - 이에 미국의 13개주가 연합하여 독립전쟁 발발

             - 7년전쟁에서 패하고 떨거지 된 프랑스가 미국을 도움

             - 1776. 7. 4 독립선언

 

  

AD 1789  프랑스 대혁명

            

 

             - 국민의회(삼부회가 바뀐 이름)를 열어 공화제를 이룩한 시민혁명 

             - 분노한 파리시민들이 무장봉기하여 바스티유감옥 습격하여 점거

             - 한계

               1) "왕&귀족 사회" --> "시민(부르주아) 사회" --> X "민중사회"

                  * 부르주아 : 은행가,법조인,대상인,의사,부농

                  * 민중 : 노동자, 농민, 공화주의자

               2) 전제 군주제 폐지, 입헌 군주제 시행, not 공화정

             - AD 1794  왕당파의 봉기를 나폴레옹이 진압

         

      

AD 1795  러시아의 침략과??  폴란드 분할

            

 

      

  

AD 1812  프랑스의 러시아 정벌(모스크바 원정)

            

 

             - AD 0000  나폴레옹의 재기 실패

                

       

AD 1814  루이18세가 왕정(군주정) 복고

             - 전제군주제 vs 입헌군주제 선택사이에 갈등

             - 新헌법에 시민기본권, 평등, 재산권보장, 양원제의회

             - (망명에서 귀국한) 왕당파 귀족은 권력재탈환에 혈안, 아르투아 백작(루이16세 동생)과 결탁

     

  

AD 1824  루이18세 사망, 샤를 10세(아르투아 백작) 즉위       

             - 의회 해산명령, 의회는 정부 불신임안 의결로 대립

             - 7월 칙령(출판자유중지, 투표방식개선외) 발표

      

   

AD 1827  런던조약 체결로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독립국 승인받음

             - 마케도니아 -> 로마제국에 멸망당하고 ->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고 식민지령에 있다가

               그리스 자국 독립운동 벌리다가 그리스 국가 건설됨.

      

      

AD 1830  프랑스 7월 혁명 발발

            

 

          

      

AD 1832  영국 선거법 개정  :  영국의  자유주의 진행

            

 

            

          

AD 1840  아편전쟁            

             - 영국 vs 청 전쟁이며, 2번에 걸쳐 청이 패하여 중화사상이 뿌리채 흔들리고, 서세동점의 시대가 시작됨.
             - 영국의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의 수출대비 중국의 차 수입이 많아서, 영국이 차 수입을 결재할 은이 부족. 이에, 아편수출로 무역적자

               해결하려함.

             -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 하층민 사이에서 아편이 인기를 끌어서, 중독자가 많이 생겨나자, 청나라 정부가 강력한 아편단속 정책을

               내세우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몰아냄.

             - 영국이 이에 반발하여 무역항 확대 명분으로 1차 아편전쟁을 벌임. 영국이 승리로 난징조약 체결하여 홍콩을 할양받고 5개항구 개항

             - 중국은 광활한 영토때문에 자급자족 성격이 강하여 1차 전쟁후 개항에도 무역이 확대되지 않았음. 되려, 대영 항쟁이 전개됨.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군 구성하여 광저우 침략하였고(2차 아편전쟁),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를 침략함.

               연합군이 텐진 점령후 텐진조약을 체결, 청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 지급, 개항 항구 확대, 아편 무역 합법화, 기독교 공인 시행.

             -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진격을 계속해 결국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 조약 체결, 전쟁 종료함.  

                  

       

AD 1853  크림전쟁 발발 (~ 1856)

            

 

             - 당시 발칸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쇠퇴하였고,슬라브 민족 독립운동 전개. 이에 열강들은 투르크령에 진출하려 격렬히 대립.

             - 러시아는 최대의 곡창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서유럽으로 곡물을 효율적으로 수출하기위해 지중해 통로에 해당하는

               보스포러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투르크령 내의 그리스 정교 신자 보호를 요구하며 전쟁

               일으켰고,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가 참전함.

             - (1812 프랑스 나폴레옹군 격파하던 유럽 최강의 러시아 육군) 하지만, 러시아 군대는 후진성 드러내고 1년만에 항복. 

    

    

AD 1861  남북전쟁 

             -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고,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하 '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공화당은, 작은정부, 친기업

             - 해밀턴 : 공업, 제조업 기반, 영국형 신속한 경제성장 추진, 독립전쟁때의 부채를 연방정부의 국채로 전환   

             - 제퍼슨 : 농업 기반

             - 남북전쟁=철도전쟁, 철도가 많은 북쪽이 유리했다.   

    

    

AD 1870 

            

 

        

      

AD 1894  청일전쟁

    

    

AD 1904  러일전쟁

    

   

AD 1912  중화민국 성립

  

 

AD 1914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AD 1939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AD 1943  카이로 회담(카이로 선언)

            

 

             - 루즈벨트 대통령(미국), 처칠 총리(영국), 장제스(중화민국) 세 연합국 수뇌가 모여 개최한 회담으로(11.22 ~ 26),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대응과 아시아의 전후 처리에 관해 협의함.

                여기서,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 빼았고, 한국의 독립보장 선언(11.27에 발표). 이것은 2차 세계대전후

                일본 영토문제에 관해 내린 최초의 공식성명임. 1) 미,영,중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가한다. 2) 3국은 일본침략 응징하나 영토확장 의사없음. 3) 1차세계대전 이후 일본 취득한 태평양제도 박탈, 만주/타이완의 중국 반환, 일체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 구축. 특별조항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것을 결의함.

 

AD 1943  테헤란 회담

            

 

             -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 당 서기장,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가 소유럽에 제 2전선을 형성하는걸 토의

          

AD 1945  얄타 회담 (2월) 

            

 

 

             - 2차 대전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연합국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 패배시키고 그 후를 의논하기위해 2.4 ~ 2.11 기간동안 모임.

             - 회담 수뇌는 영국 총리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소비에트 연방 당 서기장 스탈린.

             - 이 회담에서 나치 독일을 미,영,소,프 4국이 분할점령한다는 원칙 세움.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 폐쇄/몰수. 주요 전범 국제재판에 회 부. 폴란드에 대해선 동부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고, 동독의 일부지역을 폴란드에 주기로 함.

             

AD 1945  포츠담 회담 (7월)

            

 

             - 독일 포츠담에서 7.17 ~ 8.2 기간동안  미국, 소련, 영국이 3자회담 실시

               얄타 회담이후 소련은 중동부 유럽 점령. 스탈린은 폴란드에 꼭두각시 공산정권 수립. 영국은 새로운 총리. 루즈벨트 대통령 사망후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 수행.

               포츠담 선언에는 스탈린이 서명하지 않고, 참석치 않았던 중국의 장제스가 전신을 통해 선언 참가

 

 

AD 1945  2차 세계대전 종료

         

              

                     

 20C中  2차 세계대전 종료 : 현대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