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수식어보다 설득력 있는 솔직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고민정 아나운서. 든든한 남편과 듬직한 아들,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그녀의 감성 육아 에세이를 전한다.시계
[명사]
자연현상 가운데 일정하게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기계적·전기적으로 시간과 시각을 잴 수 있게 고안한 것.
유출속도(流出速度)가 비교적 일정한 것을 이용한 물시계·모래시계, 진자(振子: 추)의 왕복운동을 이용한 진자시계 등 각 시대별로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시계가 만들어졌다.
기억을 꺼내다
"와, 이 작은 대야에서 은산이가 목욕을 했단 말이야? 지금은 엉덩이만 들어가겠는데? 기껏해야 1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정말 많이 컸구나."
얼마 전 친정집에 갔다가 은산이가 갓난아이였을 때 썼던 대야를 보게 됐다. 투명한 청록색의 그 대야는 어른들이 세수할 때 쓰던 보통 크기의 대야로, 아이 욕조를 살까 말까 고민할 때 친정엄마가 세숫대야 두어 개만 있으면 훨씬 편하게 씻길 수 있다고 강력 추천해서 장만한 것이었다. 은산이의 근육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앉아 있지도 못하던 때 그 대야에 담가놓고 한 손으론 목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론 구석구석 몸을 씻겼다. 김치 담글 때 쓰는 커다란 대야도 있었지만 자그마한 몸집이 들어가기엔 청록색 이 녀석이 제격이었다. 친정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나는 이 대야를 보며 3.2kg의 작은 생명이 우리와 한 가족이 됐던 그때를 떠올렸다. 불과 1년 전쯤의 일인데도 우리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각자의 기억을 붙잡고 서로 퍼즐 맞추듯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난 도대체 기억이 안 나네. 지금도 작은 것 같은데 그때는 고작 이 팔뚝만 했다는 거잖아? 난 그때 몸이 회복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지금의 10kg로 기억되는데…. 진짜 생각 안 난다."
"그땐 밤에 잠도 못 자고 은산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잠들곤 했었지. 그나저나 오래된 일도 아니고 내가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억이 안 나네."
남편과 나의 대화를 들으시던 엄마는 귀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둘째, 셋째도 낳는 거야. 막 낳았을 때는 힘드니까 다시는 아이 안 낳겠다고 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또 낳는 거지. 난 너희 3남매를 낳았는데도 어떻게 키웠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더라."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신으로 크로노스가 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자 누이인 레아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낳지만 자식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란 저주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즉시 집어삼켜버린다. 자식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레아는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났을 때 돌덩이를 아들이라 속여 삼기케 하고 크로노스 몰래 크레타 섬에서 키운다. 성인이 된 제우스는 대지의 신이자 할머니뻘인 가이아의 가르침에 따라 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여 그가 삼켰던 형제자매 모두 토해내게 한다. 결국 제우스는 가장 늦게 태어났지만 바깥세상에서 산 기간으로 치면 가장 오래됐기에 막내이면서 동시에 맏이가 된다.
'세월의 무상함', '시간은 금', '유수와 같은 시간' 등등 시간에 대한 동서고금의 표현은 다양하다.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으며 소중함을 알지만 자꾸 잊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신화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학생 때는 내가 어른이 되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어느덧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볼록 나온 배를 붙잡고 뒤뚱뒤뚱 걸었던 게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배 속에 있던 녀석이 태어난 지 벌써 18개월이나 지났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만큼 내 기억도 무척 빠른 속도로 지워져가고 있다.
특별한 하루 12월 7일
2011년 12월 2일, 진통이 와야 할 날인데 아무 느낌이 없다. 책에선 생리통처럼 아랫배가 싸하게 아파오면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때 병원으로 가라고 하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최대 5일까지 기다려보고 그래도 진통이 없으면 유도분만을 해야 한단다. 12월 6일, 오늘까지도 아프지 않으면 내일은 무조건 병원에 가서 유도주사를 맞고 분만을 해야 하기에 마지막 외출이란 생각에 남편과 케이크를 먹으러 나섰다.
"나, 너무 우울해. 왜 진통이 없는 거야?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둘째를 임신한 거였더라면 오히려 그 5일을 맘껏 즐기며 보냈을 텐데 그땐 왜 나만 다른가란 생각에 침울해했다. 12월 7일, 해가 밝아오면서 분만실로 들어갔다. 유도주사를 맞으면 폭풍처럼 진통이 몰려오면서 하늘이 노래진다기에 잔뜩 긴장했는데 3시간이 지나도 생리통 정도의 통증뿐이어서 병원 복도를 어슬렁거리기까지 했다.
"뭐야, 겨우 이 정도 갖고 그렇게 난리들을 쳤던 거야? 애 낳을 만한데?"
나의 이런 건방진 말을 들은 출산의 신 헤라가 눈썹을 치켜들며 째려봤나 보다. 4시간째 접어들면서 진통이 시작되는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난 오만상을 쓰며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남편이고 뭐고 모든 게 거추장스러웠다. 워낙 겁이 많아서 분만 전에 이미 무통분만을 신청해놓았다. 아이에게 안 좋을 수 있어 무통분만을 하지 않는 엄마들도 많지만 난 의학이 발달한 만큼 그걸 이용해야 한다는 궤변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무통주사를 맞으면 노랗게 변했던 하늘이 평화롭게 돌아온다는데, 그래서 그것만 믿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은 아직 안 된다며 계속 참으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분만실로 들어올 때마다 내진을 하는데 발로 뻥 차버리고 싶을 만큼 무척 아팠다. 지금 이 순간도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 진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진다.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무통주사를 맞아도 되는 시점이 찾아왔고 주사를 맞자 욕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에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아무런 의학적 도움 없이 100% 자연분만을 한 모든 어머니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 고통을 참아낸 이들이라면 못할 게 없고 불가능이 없는, 진정으로 존경받아야 할 이들임을 인정한다.
그렇게 은산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고 난 진짜 엄마가 됐다.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와 한 몸이었던 녀석이 태어난 것이다. 무거운 배 때문에 하루도 편하게 잠들지 못했던 나는 열 달 만에 처음으로 똑바로 누워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평화도 고작 며칠뿐이었다. 산통만큼이나 무섭다는 젖몸살이 시작됐다. 아이의 양식인 젖은 몸 안에서 계속 만들어지는데 유선이 뚫리지 않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한정돼 있고 젖은 계속 만들어지기만 할 뿐 터지지도 않았다. 결국 숨구멍을 찾지 못한 가슴은 엄청난 통증을 유발했다.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진 가슴은 매일 밤 날 눈물로 지새우게 했다. 남편은 통증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준다는 양배추를 사다 날랐고 내 온갖 짜증을 받아주는 것으로 고통을 나눴다. 틈틈이 마사지를 해줘야 뭉친 가슴이 빨리 풀린다는데 남편은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만 볼 뿐 건드리지도 못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 너무 아파. 엉엉엉."
"그냥 양배추만 붙이면 안 돼? 터져버릴 것 같아 못 건드리겠어."
원래부터 저렇게 심약했나. 마누라가 다 죽어가는데 저렇게 벌벌 떨다니, 왜 여자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하는 짜증과 분노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엄마 배 속에 있느라 쪼글쪼글해진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차오르며 매일 변하는 모습을 평화롭게 지켜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내 몸의 고통이 무척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뿐 아니라 열까지 나 산통을 겪을 때처럼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낮에는 전문가에게 마사지를 받으니 좀 참을 만했지만 저녁에는 다시 젖이 꽉 차오르면서 열과 통증으로 온밤을 지새워야 했다. 젖을 인위적으로 빼주는 유축기를 가슴에 대고 눈시울을 붉혔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40주의 기적
돌이켜보니 임신한 열 달 내내 온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임신한 사실을 안 그 순간에는 몸살 기운처럼 오한이 와 으슬으슬 떨리더니 이내 입덧이 찾아왔다. 밥 냄새와 마늘 냄새가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속은 느끼한데 김치는 마늘 때문에 먹을 수가 없고 남편한테 기대어 자고 싶었지만 한국인에게 밴 마늘 냄새 때문인지 그조차도 속이 뒤집혔다.
"욱, 어지러워. 손발이 자꾸 떨리고, 다리에 힘도 풀려."
아침 7시에 시작하는 방송이어서 새벽 4시부터 준비를 하고 출근하던 때였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입덧으로 녹초가 된 몸을 겨우 이끌고 회사에 나왔는데 메이크업을 받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더니 점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한 멀미 증세처럼 어지럼증이 찾아오더니 방송 들어가기 30분 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변해가고 스태프들은 곧 시작해야 할 방송 때문에 초긴장 상태였다. 담당 PD는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쓰러져도 스튜디오에서 쓰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난 만류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며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온 힘을 다해 방송에 집중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치 경련처럼 떨리는 손발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함께 진행했던 오언종 아나운서가 웬만한 건 다 커버해주면서 생방송을 이끌어갔다. 그 사이 남편은 스태프의 전화를 받고 카메라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님들, 기술 감독님들, PD, FD, 작가까지 그렇게 많은 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번에 받았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덧은 가라앉았지만 무거워지는 배 때문에 바로 누워 잘 수가 없었다.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게 오히려 쉰다는 느낌이 들만큼 잠자리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배 밑에 베개를 깔고 다리 사이엔 쿠션을 낀 채 남편한테 한 팔을 걸쳤지만 편안히 잠들지 못했다. 2시간마다 불편함에 깼고 차라리 빨리 동이 텄으면 좋겠다고, 이 밤이 제발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기도했다. 이 긴 시간을 두 번, 세 번, 심지어 우리네 할머니들은 열 번까지도 보냈다는 걸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은산이를 낳은 이후 관절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아이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고, 밤낮 구분 없이 2시간에 한 번씩 젖을 주느라 잠 고문을 당했으며 머리카락이 한 줌씩 쑥쑥 빠지는 걸 보면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남편도 나의 고통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둘째에 대한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작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망각'의 선물을 우리 인간이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둘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실패하고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즐거운 기억보다 힘든 기억을 더 강하게 인지하는 인간의 속성상 고통의 기억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쯤 되니 모든 것을 탄생시킴과 동시에 시간과 함께 사라지게 하고, 시간을 거슬러 기억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망각하게 하는 모든 신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나저나 내가 그 고난의 행군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음…, 글쎄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2004년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2005년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부부가 됐고, 결혼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