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A%B8%B0%EA%B0%84%ED%86%A0%EB%A7%88%ED%82%A4%EC%95%84
- 티탄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둬서 이에 열받은 가이아가 기간테스를 만들어 내어 올림포스 신들을 공격하였다.
- 예언에서 인간영웅의 도움이 있어야 기간토마키아에서 승리할수 있다고하여 제우스는 티타노마키아 이후에 영웅생산에 심혈을 기울임
- 결국 헤라클레스 만들어내고 시련줘서 level up 시키고 죽여서 올림포스로 데려와 기간토마키아 승리하며 그리스 신화 전반부가 엔딩됨.
- 말잘듣는 몇 영웅제외한, 이제 쓸모없어진 다른 영웅들을 제거하기위한 신들의 숙청무대가 바로 트로이 전쟁임
- 트로이 전쟁이후, 신들의 지배가 굳건해지고, 괴물들도 씨가 마르고, 영웅이 필요없는 시대가 찾아오게되는것이 그리스 신화 후반부.
- 오디세우스 귀향, 아이네이아스 로마건국 등은 신화의 에필로그 격임.
□ 신들의 계보_헤시오도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esign&logNo=30023900745
: 신화 연대기
타골라스의 신화이야기
그리스-로마신화 사건 히스토리 (연대기) | -사건발생진행순 | |
⊙카오스시대와 태초의 빅뱅 | ||
⊙가이아의 탄생과 우주의 창조 | ||
⊙우라노스의 출생과 우주지배 | ||
카오스의 자식들 - 에레보스(어둠)와 닉스(밤)의 형성 | ||
⊙크로노스의 치세 (12거신족의 우주지배) | ||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 ||
⊙제우스와 형제들의 반란 - 10년간의 거신전쟁 | ||
크로노스 - 자식들을 토해냄 | ||
⊙제우스의 신권장악과 코스모스(우주)의 질서확립기 | ||
·3형제의 제비뽑기 | ||
⊙제우스의 여성편력과 -올림포스 권력의 형성 (신들의 탄생과 입성) | ||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범하다. (아테나의 임신) | ||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창조 | ||
인간에게 불을 훔쳐 전해주고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 | ||
⊙거인전쟁 | ||
가이아는 외눈박이 거인들인 기간테스등을 낳아 올림포스를 침입 | ||
⊙올림포스의 재정비 - 제우스의 권력장악 | ||
헤파이스토스의 신전 재건축 | ||
⊙선사인류의 역사 -황금의 시대(크로노스의 치세) | ||
은의 시대 | ||
⊙아폴론 | ||
·왕벰 퓌톤을 활로 무찌른 아폴론 | ||
⊙영악한 아기 헤르메스 | ||
·아기 헤르메스 아폴론이 사육하던 소를 훔치다 | ||
⊙에우로파 | ||
제우스 소로 변해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파를 크레타섬으로 납치 | ||
⊙사냥의 처녀신 아르테미스 | ||
·카드모스의 아들 악타이온 아르테미스의 나신을 보고 | ||
⊙디오니소스의 고난에 찬 여정 | ||
제우스 -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를 구름으로 변해 취하다 | ||
⊙페르세우스의 여행 | ||
·제우스 황금비로 변해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를 범하다. | ||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 | ||
무사이의 여신들을 희롱하다 떨어져 죽은 퓌레네오스 | ||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원 (인간, 영웅들의 발흥) | ||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원 | ||
⊙아테나의 영웅 테세우스 | ||
·메데이아는 아이게오스의 본처소생, 테세우스를 독살하려다 발각 | ||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탈출 | ||
크레타섬에 억류된것이 싫어진 다이달로스는 하늘을 나는 날개를 만들어 섬의 탈출을 시도한다. 하늘을 나는 것에 신이난 아들 이카로스는 이카리아 바다 위에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이 녹는 바람에 추락사한다. 수다장이 자고새가 이를 보고 깔깔거린다. 다이달로스는 누이의 아들 페르딕스(탈레스)를 맡아 기술을 가르치다가 톱과 컴파스를 발명하는 천재성을 시기하여 아크로폴리스의 성탑위에서 밀어 떨어뜨하리지만 아테나의 도움으로 자고새가되었다. 방랑하던 다이달로스는 시실리섬 이이트나의 왕 코칼로스의 보호밑에 숨는다 | ||
⊙테세우스 | ||
칼뤼돈의 멧돼지사냥 | ||
⊙영웅 헤라클레스 | ||
알크레네와 헤라클레스의 탄생 | ||
⊙신비와 혼돈속에 빠진 인간 | ||
오누이 뷔블리스와 카우노스의 이룰수 없는 사랑 | ||
⊙전쟁의 서막 | ||
테티스와 인간 펠리오네의 결혼 | ||
⊙트로이전쟁 | ||
헬레네를 납치 아내로 맞아 돌아온 파리스 | ||
⊙오뒤세우스의 여정 | ||
풍신 아이올로스에게 바람의 가죽부대를 선물받다 . | ||
⊙아이네이아스와 유민의 시대 | ||
델로스의 아니오스왕의 식객이되어 환대받다. | ||
포모나에게 열렬히 구해하는 베르툼누스 로물루스의 로마정복 [출처] 그리스신화-요약연대기|작성자 따끈 |
< 신화의 특징 >
- "휴머니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 영생을 제외하고 신도 인간들과 똑같이 사랑,질투,갈등,욕망을 느낀다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결실로 영웅이 태어난다. 신과 인간사이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 "현세주의"에 뿌리를 두고있다.
: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소중히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그리고, 유한한 인생이지만 최선을 다했다.
< 신화의 전승 >
- 신화는 그리스인들 사이에 구전되거나 기록되어 전승된 것을 주된 내요으로 한다.
-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하는건, 그리스 신화가 로마를 거쳐 유럽으로 뻗어나가면서, 명칭도 바뀌고 로마신화의 일부가 섞였기 때문이다.
- BC 8C경, 구전으로 떠돌던 그리스 신화는 "호메로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 BC 5C경,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에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우스"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를 통해
신화의 문학적 지평이 넓어졌다.
-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 천년동안 암흑속에 파묻혀있다가, 재생의 의미인 르네상스 운동(14C경) 화려하게 부활, 헬레니즘 명성 회복함.
- 이후 그리스 로마 신화는 기독교 사상과 함께 서양문화 형성에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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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의 그리스신화
그리스 문명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다. 신화, 아테네의 민주주의, 파르테논 신전, 올림픽, 비극,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 등 실로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듯하다.
그 중에서도 신화는 매우 독창적인 산물로서 인류의 고귀한 유산이다.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신화 속에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화는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모습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나르시시즘 등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이미 굳어져 있으며, 신화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문학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신화를 가리켜 흔히 “상상력”의 보고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다시 말하자면 신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이야기 즉 허구라는 것이다. 신화라는 의미가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니 신화를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이야기 즉 허구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반면에 역사는 인간이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19세기 랑케 이래로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역사는 인간의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재현해주는 학문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다면 실재 혹은 과학으로서의 역사와 허구로서의 신화는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시간에는 신화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진리 담지자로서의 신화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는 한편 역사의 신화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의 왜곡 문제를 논의해보겠다.
1. 그리스는 어디에서?
그리스인들은 이민족을 바르바로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야만족이란 뜻이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에게도 이 명칭을 부여하여 ‘아시아의 야만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관점은 18, 19세기 유럽 인들에 의해서 재건되었는데, 그들은 ‘미개인’ 혹은 ‘야만인’과의 대조를 통해 자신들을 규정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처럼 자신들의 문명을 다른 문명들과 구별하여 발전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정당한 것일까?
(1)
(2) 그리스 신화가 전하는 에게 문명
① 유럽의 어원 : 그리스 신화 가운데 에우로페(europe)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서기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시인 모스코스가 신화를 바탕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시에 따르면, 어여쁘기로 소문난 공주 에우로페는 어느 날 묘한 꿈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눈을 떴다.
여자의 모습을 한 두 개의 대륙이 그녀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을 하는 꿈이었다. 아시아 대륙은 에우로페가 자기에게서 태어났으니 그녀는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의 이름 없는 대륙은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 제우스가 에우로페를 자기에게 점지해 주었다면서 맞섰다. 이 야릇한 꿈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에우로페는 친구들과 밖으로 나갔다. 바닷가의 아름다운 꽃들을 희롱하던 이들 앞에 세상에서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황소 한마리가 나타났다. 매끈한 밤색 털, 은빛 테를 두른 이마, 초승달 같은 뿔. 에우로페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 황소 곁에 다가가 다정한 손길로 소의 몸을 이리 저리 쓸었다. 소는 그 어떤 피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더니 에우로페 앞에 무릎을 꿇고 웅크렸다. 등에 타라는 시늉 같았다. 에우로페가 사뿐히 올라타자마자 소는 벌떡 일어서더니 무서운 속도로 바다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날아 에게 해가 붉은 포도주 빛으로 물들 무렵에는 크레테 섬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 황소는 제우스 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올림포스의 문을 지키는 호라이(Horai:계절의 여신들)가 혼례 준비를 갖추었다. 에우로페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여 크레테 문명을 일군 미노스(Minos)를 낳았던 것이다. 즉 그리스 문명의 모태인 미노아 문명은 은 바로 소아시아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② 테세우스 신화와 아테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보다 조금 늦게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아테네인의 진취적인 기상과 용기 그리고 신중함을 한 몸에 지니고 태어난 아테네의 왕자였다. 트로이젠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는 아테네 왕이던 아이게우스(Aigeus)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외할아버지에게 전해 듣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이때부터 그의 모험심과 진취성이 발휘된다.
외할아버지 피네우스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육로를 피해 바닷길로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위험을 회피하는 비겁자가 되기 싫다면서 굳이 육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선택에는 당시 수많은 모험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헤라클레스에 대한 경쟁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아테네로 가는 길에서 테세우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단순 명료한 정의 관념에 기초하여 무수한 악당을 처단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테네에 도착한 테세우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전 고대의 자랑스러운 아테네와는 거리가 먼 비참한 조국이었다. 아이게우스가 다스리는 아테네는 미노스 왕의 크레테에 조공을 바쳐야만 하는 속국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공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7년마다 일곱 쌍의 남녀를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때마침 조공의 때가 다가오자 테세우스는 자신이 직접 14명의 인질 속에 들어갈 것을 자원하였다. 희생양으로 선정된 아테네의 청춘 남녀가 크레테의 수도 크노소스(Knosos)에 당도하면 미노스는 이들을 라비린토스궁에 가두었다.
이곳은 한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으로, 오늘날까지도 솜씨 좋은 기술자의 대명사로 남아있는 아테네의 명공 다이달로스(Daidalos)가 미노스의 부탁에 따라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미궁은 크레테 왕실에서 일어난 낯 뜨거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비밀의 주인공은 왕비 파시파에였다. 그녀는 미노스 왕이 애지중지하던 황소에게 그만 반해버렸다. 그래서 마침 크레테에 초청 받아 와 있던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하여 나무로 매혹적인 암소를 만들게 한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가 황소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수간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소의 얼굴을 한 인간 미노타우로스(미노스의 황소)였다. 라비린토스 궁전은 바로 이 미노타우로스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가두어두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아테네의 인질들이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쓰였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천하의 테세우스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이 미로를 빠져나올 도리가 없었을 것이며, 언젠가는 기진맥진하여 괴력의 미노타우로스에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감한 자에게는 미인이 따르는 법이라던가? 아테네의 인질들이 크노소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테세우스의 준수한 용모에 반해버린 미노스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는 사랑을 좇아 조국과 아버지를 배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유명한 아리아드네의 실이 등장하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실의 끝을 입구에 묶고 들어가 태어나서는 안될 괴물과 맞부딪쳐 비명에 간 아테네의 젊은이들의 원한을 갚고 무사히 미로를 빠져 나왔다.
이처럼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하는 신화는 아테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을 탈출해 나오는 탄생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테세우스의 활약에 의해 아테네는 크레테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③ 트로이 전쟁과 소아시아로의 진출
점차 발전 속도를 더해가고 있던 미케네는 내부적으로 인구의 증가와 식량의 부족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정복전쟁이었고, 그 대상은 거리가 가깝고 토지가 비옥한 소아시아 지방이었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은 후대에게 미케네의 식민지 획득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리스의 발전과 몰락
B. C. 8-7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사회는 인구가 급증하고 오리엔트와의 문물교류가 재개되었다. 특히 인구증가에 직면하여, 그리스 사회는 지역간의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 느슨한 지역공동체에서 구릉을 중심지로 방어하기 편리한 곳에 정주하기 시작하여 도시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전은 도시국가(polis)와 매우 관련이 깊다.
(1)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
- 귀족정 : 귀족들은 정주가 시작되기 전 촌락 공동체의 촌장들로 대토지소유자들이었으며, 말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로 폴리스 방위에 중요한 역할 담당했다. 그러나 식민지가 개척되고, 상업이 발달하여 상인?수공업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군대 역시 중무장 보병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한편, 이 시기에 농민들은 식민지에서 유입되는 값싼 농산물로 피해를 입게 되었고, 토지 귀족들은 수익성이 높은 포도나 올리브 농사로 대체하였지만 자본이 없는 농민들은 빈궁하게 되어 사회불안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솔론의 개혁(B. C. 594) : 부채로 인한 인신의 예속 금지로 공동체 의식 함양시켰으며,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4등급으로 구분하여 정치 참여에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이제는 외형적으로는 평민에게도 참정권이 허용되었다.
- 참주정 : 소외된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지 등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실시하려함. 그러나 평민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했으므로 평민층을 군사화?정치화하는데 노력하였고, 가난한 농민들의 빈궁화?예농화를 완화하는 정책을 폈다.
- 클레이스테네스 : 귀족들의 전통적 세력기반을 해체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4에서 10로 개편하였으며, 500인 평의회를 만들어 거의 모든 시민이 정무에 참석토록 했다. 그러나 하층민은 생계문제로 인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시민의 여가는 직접 민주제의 기본 요건이며, 시민의 대체노동으로서의 노예제가 필수적 요소였다.
- 페르시아전쟁 (490-479) : 점차 동진해 오던 페르시아 제국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복속시키고 참주를 앉혔다. 그러던 중 밀레토스에서 반-페르시아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아테네가 이를 지원하게 되었고, 490년 약 15,000명의 군사가 그리스를 침입했으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가 크게 승리했다.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수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그리스를 침공해오자 북부 그리스 국가들은 항복했으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지상을 담당하기로 한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왕을 비롯한 300명이 전사해가면서 진군을 지연시켰으며,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전멸시킴으로써 사실상 전쟁을 종료시켰다.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테네 주도하에 델로스 동맹을 맺어, 함대를 지원하거나 분담금을 내야 했는데 대부분의 국가는 분담금을 내어 아테네를 무장시켰고, 이는 아테네에게 예속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페리클레스 : 아테네의 재건과 상업도시로의 변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크로폴리스를 피디아스로 하여금 도시의 수호신을 위한 장소로 바꾸어 놓도록 했는데, 그때 건립된 여러 신전 중에서 델로스 동맹금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페르시아 전쟁 후 모든 시민들이 정무에 참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추첨제와 수당제를 도입했으며, 공직의 임기는 1년으로 정했다.
(2)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
- 단지 시민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특히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 핵심요소인 평등의 개념이 희박했다.
- 대의 민주제가 아닌 직접 민주제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민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이는 노예노동에의 의존을 필수적으로 수반하게 되었다.
- 하층민이 점차 정치에 참여함에 따라 이들을 선동하는 데마고고이(demagogoi)라는 선동정치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3)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었으며,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을 통해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 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하강'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통해 아테네 영광의 시대를 기록하였던 역사가라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아테네 몰락의 과정을 후세에 전한 역사가였다. 현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헤로도토스에 비해 투키디데스야말로 엄정하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서술을 실행에 옮겼던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진정 받아야 할 사람은 투키디데스이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 그것은 헤로도토스의 문학성보다는 투키디데스의 합리성이나 과학성을 더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외견상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의 이면에는 휴브리스/네메시스라는 한 짝의 관념에 바탕을 둔, 즉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역사관이 잠복해 있다는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그 해석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맹주로 등장한 아테네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제국주의적 정책을 강화시켜 동맹국들을 속국의 지위로 전락시켰다. 스파르타는 이런 아테네의 강압적 조치에 반발하였으며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궁극적으로 아테네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와해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런데 아테네 패배의 원인으로서 투키디데스가 은밀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휴브리스/네메시스에 근거한 신의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인간성이 상실된 전쟁으로 보았다.
그리스의 모든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 한 측의 편을 들어 참가를 종용받았던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전쟁 참가를 거부하였던 멜로스에게 아테네는 강압적으로 동맹국이 될 것을 강요하였다. 멜로스는 아테네의 위협에 대항하여 "지금 항복하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싸우면 싸우는 동안만이라도 희망은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위협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로 벌어진 멜로스 전투에서 아테네는 멜로스 섬의 성인 남자 전원을 살해하였고 여자와 어린이 모두를 노예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리스의 전쟁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인간적인 오만함 속에서 신의 섭리를 위반한 것을 징벌하기 위하여 '티케'라는 '운명의 힘' 혹은 '신의 정의'가 작용하였던 결과 아테네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에 일말의 진리라도 담겨있다고 인정한다면, 아테네 멸망의 본질적인 원인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자만심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테네를 멸망시켰던 외부의 세력이 아테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페르시아가 아니라 그들이 야만국이라고 경멸하였던 마케도니아였다는 사실은 그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3. 신화 만들기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대개는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네 자신을 알라”나 아테네의 우매한 민중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절은 교과서에도 인용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생각했듯이, 소크라테스를 죽도록 만들었던 아테네의 민주정은 진정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는가?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던가?
① 아테네의 재판제도와 소크라테스
당시 재판의 첫 순서는 재판정의 서기가 501명의 배심원에게 고발장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 후 기소장을 제출한 고소인이 직접 고소내용에 대해 발언하고 피고소인은 자신을 변론한다. 배심원들은 이들의 발언을 듣고서 평결을 내리는데 이에 대해서는 항소할 수 없다. 피고의 유죄가 입증되면 배심원들은 형벌을 선택하기 위해 다시 한번 투표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평결에서 유죄 281, 무죄 220표를 얻었으며, 361대 140의 압도적인 숫자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렇다면 현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몬 아테네의 민주정이야말로 다수의 폭정에 대한 증거이며, 이성과 개인의 양심이 대중 지배에 의해 압살된 증거라 할 수 있는가?
②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관련되어 남아있는 주요한 근거자료는 플라톤의 『변명』이다. 크세노폰이 쓴 글도 두 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텍스트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며, 곳곳에서 상반된 진술이 드러난다. 그리스의 재판과정은 구두로 진행되며, 글로 된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한 명확한 진실을 밝히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 역시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변명』에서의 진술 역시 그의 제자들의 입장이라고 봐야 한다.
③ 당시 배심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기간의 30인 참주 지배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스파르타의 잔인하고 독재적인 임시정부 지배를 기억하는 아테네인들로서는 민주정에 대한 위협을 가장 위험한 일로 여겼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30인 참주 중 2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플라톤의 삼촌이었다.
- 대중들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서로 연관지어 생각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 보면 한 노인이 자기 아들을 소크라테스에게 보내 채권자를 속여 넘길 궁리를 하는 대목이 있는데, 대중들은 이를 보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동일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중들에게 소피스트는 신앙과 전통적 가치들을 무너뜨리는 체제전복자로 비춰졌고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자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물론 아테네 민주정의 약점과 대중 지배의 위험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민주정의 대안으로 소수 철인의 지배를 제시하는 플라톤의 견해는 더욱 위험한 것 아닌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비록 소크라테스가 399년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재판 이전까지 아테네 인들이 그토록 적대시하는 내용들을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하게 가르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④ 소크라테스의 재판 이야기와 교과서
그런데 우리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주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가? 우선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대중들을 국가의 법에 복종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흔히 이용되어왔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사건을 통해 우매한 대중을 부각시키고, 국가의 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요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신화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 신화와 역사
신화는 사전적 의미로 설화의 한 가지로 국가의 기원이나 신의 사적 ..... 이렇게 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신화는 엄밀한 과거 사실과는 별 관계가 없다. 반면에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다. 즉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허구, 역사는 사실이라는 이분법이 성립한다.
그러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자.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남긴 자료를 통해 현재의 역사가가 해석한 내용이다. 역사가 해석이라는 의미는 동학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다른 사람은 난으로, 또 다른 사람은 전쟁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역사는 해석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역사는 해석이며 사실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암기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그 역사를 쓴 역사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조사해야 하고, 우리 나름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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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요 부분은 이미 선사시대에 형성되었다.
B.C. 3000년이래 지중해에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크레타문명이 있었고 이것이 커다란 세력이 되어서 그리스 본토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B.C. 2000년경부터 아카이아 인이라고 하는 그리스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그리스 반도의 각지로 남하하여 문화적으로도 세력을 뻗쳐서 미케네 문화를 구축하였다. 다시 B.C. 12세기에는 도리스 인이라고 하는 그리스 민족이 침입하여 먼저 그리스에 들어온 민족은 새로 들어온 민족에게 정복당하기도 하고 또 지중해로 도망쳐 소아시아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주민과 그리스 본토의 선주민(先住民)들이 섞여 고대 그리스 문화나 신앙을 이룸으로써 신화에 있어서도 자연히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게 된다. 그래서 신화의 내용도 복잡해져 여러 가지 불일치나 모순을 포함한 점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얘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과 영웅의 생생한 모습을 전했다. 그 외에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그리스의 삼대 비극 시인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등도 그리스 신화를 전해준다. 오늘날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문학으로 미술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고 그들의 지위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나 미술 등 각 분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화의 가치는 인간 생존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 에 필요한 지식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는 것에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신화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서구의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1. 성서설(聖書設)
: 모든 신화적 전설은 사실이 위장되고 변형되기는 했으나 모두 성서의 이야기에 유래한다는 것이다.
2. 역사설
: 신화의 등장인물은 다 실재 인물이었고 그들에 관해 이야기되고 있는 신화나 전설은 모두 후세의 사람들이
부가하거나 장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우화설(寓話設)
: 고대인의 모든 신화는 우화적이고 상징적이며 우화의 형식 아래 도덕적, 종교적 혹은 철학적 사실을 포함
하고 있었는데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 자연 현상설
: 공기, 불, 물과 같은 원소는 원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고 주요한 신들은 모두 이러한 자연의 힘의
의인화(擬人化)였다. 이러한 자연의 요소의 의인화에서 자연계의 여러 가지 것을 통할하고 지배하는
초자연적 존재자의 관념으로의 이행은 용이한 것이었다.
이상의 학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한 민족의 신화는 이중 어떤 하나의 원천에서 발생했다기보다 그 전부가 결합하여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견해일 것이다. 또 이행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신화도 많다는 것과 지명이나 인명의 유래를 설명하려는 같은 욕망에서 발생한 신화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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