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근대] AD 1914 제1차 세계 대전

by loveson 2019. 6. 27.


제1차 세계 대전
 
1.기간 : 1914. 7. 28 ~ 1918. 11. 11
2.장소 : 유럽, 아프리카, 중동, 중국, 태평양의 섬들
4.이유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6월 28일) 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하며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발발함.
 
교전국 3국 협상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미국 일본 중앙유럽세력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피해 상황
군인 사망자:5,525,000명
군인 부상자:12,831,500명
실종자:4,121,000명[1]
군인 사망자:4,386,000명
군인 부상자:8,388,000명
실종자:3,629,000명[1]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근본적 원인은 사라예보 사건) 8월 1일에 이르면 독일 제국의 대(對)러시아 선전 포고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정,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

[편집] 경제적 배경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 간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경쟁자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 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 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 철도는 보스포러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 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 자본 투자로서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 간 각각의 이해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고, 독일은 375마일(약 604킬로미터) 철도선 부설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다.


[편집]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 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大)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복수 범게르만주의였다.


[편집]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왕국에 반대하는 음모가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온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 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1917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잡다한 인종 집단 간에 점증일로에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압력에 직면하여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5000만 신민의 반도 안 되는 소수, 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의 마자르인만이 지배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밖에 840만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500만의 폴란드인, 400만의 루데니아인, 550만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77만의 이탈리아인이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2] 그 가운데서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남부 발칸 지역에 분포한 슬라브족이 가장 강력한 발언을 했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에 위치한 세르비아 왕국은 이들 슬라브인에게는 자기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옹호자이며 모범이었다.

6년 전에도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는 것을 세르비아가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할 뻔 했었다.

그 후, 제국의 총참모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게 되었고 이 보잘것없는 이웃 왕국을 당장 깨끗이 짓이겨 놓을 구실만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그런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장군(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모총장) ”
  

그리하여, 황태자 암살에 직접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병합하여 세운 이 이중 군주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편집] 기타
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 유럽의 모든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3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 영토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 불편한 관계가 되면서 3제 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3국 동맹(the Triple All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대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 구도의 열강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 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장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

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 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 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3국 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

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 동맹과 3국 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3국 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 포고하였다.


[편집] 외교적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세르비아 왕국도 그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외교적인 위기를 전쟁으로 몰고 갈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은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분할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또한, 흑해와 에개 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다넬즈 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 했다.

러시아 제국은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을 때도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참패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 범슬라브 운동에 대한 동정, 숙적을 골탕 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미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로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독일도 러시아와 같이 동맹국 지원에 나선 동기가 단순치 않았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빌헬름 2세만큼 큰소리를 치는 군주는 없었다.

그는 독일제국이 완전히 지배하는 미텔 오이로파(중부 유럽)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빨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 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대영제국의 3배, 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해진 독일제국은 대영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빼앗긴 사실을 잊지 못하는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 인구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과 군사력에서 점점 낙후해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첫발을 내딛은 게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인데, 독일이 군대 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영제국은 독일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으며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양국의 많은 귀족은 공통된 전통과 혈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이 해군력의 경쟁을 촉발하자 두려움을 갖고 대비하게 되었다. 사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로(海路) 확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해로 확보와 유지는 필수였다.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역사

[편집] 전쟁 발발 전

[편집] 사라예보 사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한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각, 세르비아 왕국 출신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년 ~ 1918년)가 사라예보에 친선 방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독일어: Archduke Franz Ferdinand)과 그의 아내인 호엔베르크 소피아 황태자비를 암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왕국에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을 왜 저질렀나?”라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리가 세르비아에 입국, 암살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2]
“왕국의 평화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그러한 음모들을 뿌리 뽑을 수 있도록 하게 하라.”[2]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협상하여 결정하자는 내용의 유화적인 회답을 보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은 그들의 요구 조건 중 어느 것도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정한 최종 시한이 다가오기 전에 모두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을 바랐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8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다.[2]


[편집] 전쟁의 시작
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빈과 페테르부르크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전쟁을 발칸 반도에 국한시킬 생각으로 러시아 제국에 대해 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8월 1일 러시아가 그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동서 양 전선에서 동원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조약 의무에 따라 취해진 독일 측 결정은 조약상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적하는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날 오후 독일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했다.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즉각 프랑스 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충분히 동원하기 전에 대(對)프랑스전에서 재빨리 승리를 거두려는 속셈이었다. 8월 1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3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 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지 못하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 포고했다.

영국은 얼마나 빨리, 또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프랑스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발하지 않은 벨기에에 대한 독일제국의 공격이 마침내 균형을 깨뜨렸다.

대영제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버 해협에 면한 벨기에의 항구들이 독일군에게 함락 당한다면 전략적으로 크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대영제국의 요구를 독일이 거부하자, 8월 4일 대영제국은 독일제국에 선전 포고했다.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 했고, 12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편집] 서부 전선

착검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이 부분의 본문은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입니다. 자세한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라.

[편집] 동부 전선
이 부분의 본문은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입니다. 자세한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라.

[편집] 미국의 참전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독일의 외무 장관이었던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미국 상선을 공격하게 되자,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1917년 4월 6일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에 이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에도 선전 포고한다.


[편집] 휴전
1917년,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18년 중순 정도 되면, 동맹국들은 힘이 소진되기 시작한다. 결국, 1918년 9월 30일에는 불가리아가 처음으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불가리아가 항복한 지 꼭 한 달 후에는 오스만 제국도 항복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항복하였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에서는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자 독일 전체에서 노동자들 또한 군수품 생산에 지쳤다면서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베를린에서 친위대들과 실랑이를 벌였고, 11월 9일에는 황제인 빌헬름 2세가 퇴위하였다.

황제는 11월 10일,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같은 날, 독일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세워졌다. 1918년 11월 11일 아침, 독일 제국도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편집] 전쟁 이후의 세계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들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연합국에 대한 보복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영토로 고정되었고, 헝가리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확정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어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였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그 이후에 많은 실직자가 생겨났고, 패전국인 독일에서는 감자 하나에 수십억 마르크로 값이 치솟았다. 중화민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연합국은 패전국의 식민지 일부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 기타 독일의 식민지(카메룬) 등을 차지했으며, 영국 또한 요르단과 잔지바르 지역을 차지하였다. 타이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고, 중동 지역에도 오스만 제국과 싸운 대가로 독립을 성취하였다(이라크를 비롯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예멘 등을 꼽을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한국에서도 그것의 영향을 받아 3·1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에 해체되어 1923년에는 지금의 터키로 바뀌었다.

 

[편집] 연표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연표입니다.


[편집] 1차 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

참호 건너기에 실패한 탱크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선언하여 국제 정치가 이념화, 도덕화하기 시작했다. 이상적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인 국제 연맹을 통해 법률적, 도덕적 세계 여론에 부응하여 평화를 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부터 총력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특히 벨기에 왕국,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이때부터 기관총(영국), 독가스(독일 제국), 탱크(영국), 전투기(프랑스), 잠수함(독일), 곡사포(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의 신무기가 생겨났다. 이탈리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기관단총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일방적 평화의 강요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체제라고 하여 민주 정부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 공화국의 생명력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좌절감과 배신감은 파시즘의 발전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 참여를 거부하고 다시 고립주의에 빠짐으로써 강대국으로서 국제 역할에 괴리를 가져왔다. 결국 경제 공황이 생겨난다.
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여 다른 국가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주의가 상승하여 20세기 정치의 중요한 요소로 된다(인도, 조선 등에서 독립 운동 활발).
일본 제국은 대체로 만족하였으며, 중화민국은 1917년에 참전(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산둥 반도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사인도 하지 않고 국제 회의장에서 철수한다. 이것은 5?4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국제 정치라가 이제는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적으로 국제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편집] 사상자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사상자입니다.
참전 국가 중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의 사상자가 많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기는 왕성하였으나 민족 문제 때문에 어떨 땐 패배하곤 했다(손실률도 상당했다).

 

[편집] 기술
제1차 세계 대전 중, 과학 기술은 독가스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냈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곧 비슷한 종류의 독가스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1914년 1차 마른 전투 이후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이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편집] 언론


[편집] 명언


[편집] 참전 포스터

미국측의 참전 포스터 : “나는 네가 미합중국 육군에 지원하기를 바란다.”
제정 러시아의 참전 포스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의 우편엽서
[편집] 미국
오른쪽(첫 번째 사진)의 포스터는 역대 신병 모집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에서 발행된 것이다. 글귀는 대략 보면 이렇다. “I WANT YOU FOR U. S. ARMY.” 뜻은 “나는 네가 미합중국 육군에 지원하기를 바란다.”이다. 엉클 샘(한국어로 ‘샘 아저씨’)이 그러져 있는데, 엉클 샘은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캐릭터로 인식된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참전 포스터들이 존재했다. 어떤 포스터에는 빌헬름 2세를 짐승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편집] 영국
영국에는 아래와 같이 이런 글귀가 적힌 참전 포스터들이 존재했다.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BE READY! JOIN NOW : (준비됐다! 지금 지원하라)
TAKE UP THE SWORD OF JUSTICE : (정의의 칼을 잡아라)
WHO'S ABSENT? To it you? : (아직 지원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THERE'S ROOM FOR YOU ENLIST TO-DAY : (당신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WOMEN OF BRITAIN SAY - “GO!” : (영국의 여성들은 말합니다. “가세요!”)

[편집] 제정 러시아
다음 그림은 콘스탄틴 알렉세비치 코로빈(러시아어: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вин, 1861년~1939년)이 1914년에 제작한 참전 포스터이다. “Ты Кужекъ Родинъ”이라는 문구가 적혀진 포스터도 있었다.


[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1914년에 발행된 우편엽서에는 독일 장교(왼쪽)와 오스트리아 장교(오른쪽)가 연합국(프랑스, 러시아, 영국) 측의 근위병을 매질하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 이집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벨기에가 지켜보고 있다(빨간 태양은 일본을 가리킨다). 문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uropaischer Dreschplarz”
“Nun aber wollen wir sie dreschen!”

[편집]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동전에 그려진 닭이 독일군 사병을 공격하는 포스터가 그려져 있었다.


발발 이전

사라예보 사건
7월 위기
주요 전선

서부 전선
동부 전선
남부 전선
중동 전선
발칸 전선
대서양 전선
코카서스 전선
기타 전선

아프리카 전선
태평양 전선
연표

연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1914년
? 리에주 전투
? 타넨베르크 전투
? 세르비아 전투
? 1차 마른 전투
? 제1차 아라스 전투
? 사리카미스 전투
1915년
? 제1차 비미 고원 전투
? 메소포타미아 전투
? 갈리폴리 전투
? 이탈리아 전선
1916년
? 베르됭 전투
? 1차 솜므 전투
? 유틀란트 해전
? 브루실로프 전투
? 루마니아 전선
? 아랍 대혁명
1917년
? 제2차 아라스 전투
? 제2차 비미 고원 전투
? 파스첸다엘레 전투
? 러시아 혁명
? 바그다드 함락
? 팔레스타인 전투
1918년
? 춘계 공세
? 백일 전투
? 아라스 전투 (1918년)
? 뮤즈-아르곤 전투
? 무드로스 휴전(오스만 제국)
? 독일 11월 혁명

 군사, 과학, 기술

항공 전력
제1차 세계 대전 관련자
독가스
철도
과학 기술
민간인 학살 사건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
아시리아인 학살 사건
맺어진 조약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로잔 조약
국제 연맹
 참전국

연합국
?  러시아
?  프랑스 제국
 ?  베트남
?  대영 제국
 ?  오스트레일리아
 ?  캐나다
 ?  인도
 ?  뉴질랜드
 ?  남아프리카
 ?  뉴펀들랜드
?  이탈리아
?  루마니아
?  미국
?  세르비아
?  포르투갈
?  중화민국
?  일본
?  벨기에
?  몬테네그로
?  그리스
?  시암
?  아르메니아


동맹국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만 제국
?  불가리아

 ? 여성의 참전
? 해전
? 문학 활동
? 사상자
? 스페인 독감

 

기타 항목
? 제1차 발칸 전쟁
? 제2차 발칸 전쟁
? 마리츠 반란
? 러시아 혁명
? 적백 내전
? 시베리아 출병 작전
? 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 터키 혁명
? 그리스-터키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