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아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순수한 소녀감성을 가진 아내를 설레게 해주기 위함이었지만, 지금 우리나이 즈음에는 길거리에서 손잡고 다니면 남들이 불륜이라고 본다는 아내의 우스갯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이의 학원시간에 맞춰 간만에 마트 장보기 데이트에 나섰다.
인간의 유희 활동중에 소비가 주는 즐거움이 매우 큰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는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에게 주는 배우자와의 유대감이 나는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어릴적 엄마손을 붙잡고 재래시장을 따라 나서서 주전부리를 얻어먹은 좋은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데이트를 하는동안 아내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서 언제나 아내와 마트에 함께 다니는게 즐겁다.
마트가 가까이에 있어서 아쉽지만 잠깐의 산책을 마무리하면서 마트 건물에 들어서는데, 그동안 open준비한다고 번잡스러워 눈에 안띄었던건지 모르겠지만 건물 입구에 리퍼마켓이 보였다.
공간에 한계를 극복하려는듯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물건을 작은 공간에 구석마다 켜켜이 쌓아놓아서 웬지 보물찾기 놀이터 처럼보여 흥미로웠다.
잠시 물건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불현듯 나의 최애 아이템, "델키(Delki) 전동커피그라인더"가 생각났다.
집에 불이 난다면 다른것들보다 이것을 먼저 챙길거라고 가족들에게 큰소리 칠만큼 나의 이놈에 대한 사랑은 깊다.
사실은 이놈도 리퍼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놈이었다.
그럼 이놈은 어떻게 우리집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군생활의 쓸쓸함과 고단함을 달래주었던 달달한 믹스커피의 입맛을 그대로 장착하고 전역하여, 첫 회사에 입사후에도 열심히 일하면서 믹스커피의 달콤함으로 피로를 달래던 어느날,
우연한 기회로 그 깊고 그윽한 향에 이끌려 원두커피를 알게되었고, 한 잔 두 잔 그 맛에 매료되어갔다. 결국,
직접 원두를 갈아서 먹기위해 그라인더까지 구입하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그때, 핸디한 외관과 시크한 인상이 맘에 드는 휴대용 수동그라인더를 구입했고, 오랜동안 함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며 커피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욱 커져가는 만큼, 수동 그라인더로 힘겹게 원두를 갈아내야하는 부담감도 더더욱 커졌다. 결혼 후, 가끔씩 아내에게 커피를 만들어달라 부탁했지만, 아내도 그라인더 사용엔 엄두가 나질않아 거절하기 일수였다.
그렇지만, 왠지 전동 그라인더를 사용했을때는 내가 원하는 적당한 상태로 원두가 잘 갈리지 않을꺼 같아서 최대한 수동 그라인더로 버텼다.
어느 저녁의 꽉막힌 퇴근길, 피로감에 스트레스와 짜증이 쌓여서 환기를 위해 잠깐 창문을 열었는데 묘한 외관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큼지막한 간판이 붙어있지만 당시에만해도 한참 준비중이여서 뭐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리퍼상점.
알뜰살뜰 하기를 자랑처럼 자부심으로 생각했던 내게 디스카운트라는 유혹은 강렬했다. 그래서, 모처럼 맞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주말 휴식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가족을 이끌고 상점을 방문. 이것저것 둘러보다 우연찮게 Delki 그놈을 발견! 살까말까 고민하는 나의 주저함이 무색하게 오히려 와이프가 시원하게 구매결정!
집에 가져와서 곧바로 시연을 해보니, 가히 이건 신세계!!
원시인이 신박하고 편리한 문명을 맛본 듯 한 번에 홀려버렸다. 그후로, 10년을 넘게 나와 동거동락했던 수동 그라인더는 벽장 구석에 쳐박혀버렸고, 이놈이 당당히도 주방 한가운데 상석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아내도 그 편리함에 대만족하여 내 커피 주문에 전혀 싫은내색없이 흥쾌이 준비해준다.
팔뚝이 터져나가는 고통에 몸부림 치면서도, 그냥 무식하게 수동 그라인더를 써왔는데,
그 주말에 과감히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Delki를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가 내게 왔을까?
기회의 신 카이로스,
많은 이들은 그가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스쳐지나간다고 했다.
주의해야 하는건, 독특한 그의 외모에서 알 수 있듯이 길게 기른 앞머리로 얼굴이 가려져 그가 다가왔을때 알아채지 못해서 재빨리 달아나 버릴수 있기 때문에 항상 눈을 크게뜨고 그가 오는지 잘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그저 잘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자연스레 그 장난꾸러기 같은 신이 내옆에 다가와주는줄 알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향기로움이 내게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러니, 내가 이루고 싶은게 있다면, 꿈꾸는게 있다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서 그것이 존재하는 그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 내가 반드시 다가서야 하는것이다. 그래야만 내 노력을 도와줄 수 있는 카이로스도 만날수가 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사 최종결정 과정에서 신발을 벗고 시승한 그모습에 비행선 설계사가 감동하여 최종 발탁 되었던 사람이다.
그 일화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발을 벗고 탑승했던것 만큼, 너무도 선발이 되고 싶었던 그 진심어린 마음에 감탄하며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에서 탑승의 기회를 얻기 위해 거기까지 다다른 그의 노력에 더 박수를 보내고싶다. 어쩌면, 그 비행선의 문턱에 카이로스가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행운을 기다리는 자들이여,
과감히 일어서라!
힘껏 움직여라!
다가서라!
주말휴식의 달콤함을 뿌리치고 다가가 Delki를 만났던것처럼...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 부부싸움 화해의 기술 : 사과하는 방법 (0) | 2022.10.07 |
---|---|
[철학] 똥은 피해야 한다, 반드시 (4) | 2022.10.05 |
[철학] 호모 노트쿠스 (Homo Notecus) : 기록하는 인간 (2) | 2022.09.28 |
[철학] 부부, 균형과 조화의 결정체 : 부부싸움 화해를 위한 글 (4) | 2022.09.23 |
[철학] 감사, 겸손의 다른 말 (6) | 2022.09.21 |